[토요판 커버스토리]누가 ‘문화’를 지배하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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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했던 논쟁… 뜨거웠던 대선… 그 이후

“이번 선거의 개 똥구멍 같은 온갖 개수작들…. 2013체제… 그것도 시국 얘기인가? 아니면 막걸리에 소주를 섞어 먹은 상태인가?”(시인 김지하)

“그가 독재자의 딸의 품에 안길 수 있는가. … 그의 시 오적에 붙인 개 견(犬)자가 자신의 명예 뒤에도 따라 붙을 것임을 예견했어야….”(시인이자 화가 강행원)

독설이다. 초박빙의 선거판에서 주고받는 막말보다 거칠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최초의 성 대결을 벌인 대선주자들 못지않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들이 있었다. 시인 김지하 씨와 문학평론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다.

김 씨는 일간지 칼럼에서 “그 깡통 같은 시국담…. 그의 입은 계속 벌려져 있는 상태다”라고 맹공했다. 야권에 ‘2013년 체제’라는 화두를 제안하고 야권 대선후보 단일화를 추진한 백 교수의 정치적 행보를 겨냥한 말이었다.

백 교수를 지지하는 쪽의 반격은 대선 이후 나왔다. 한국작가회의(옛 민족문학작가회의)는 16일 열린 정기총회에서 ‘작가의 품위를 현저히 손상시킨 회원’ 김지하 제명 안건을 발의했고, 4월 열릴 이사회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유신독재에 저항하다 사형 선고를 받은 김지하의 구명을 위해 출범한 단체가 태생을 부정하면서까지 김지하를 중징계하려는 것이다.

고달픈 삶을 위로하던 문화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으로 부상했다. 이성적인 설득보다 감성적인 매혹을 선호하는 시대, 마음을 사로잡는 힘을 지닌 쪽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선거 때면 후보자들은 인기 작가의 지원을 끌어내려고 그의 집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다. 선거 유세장의 후보 옆자리는 후보를 빛내줄 문화계 인사들 차지다. 쇼가 돼버린 선거 유세의 막후 기획도 문화 재능꾼들의 몫이다.

권력의 조력자였던 문화의 힘은 권력을 능동적으로 창출해내는 기획자로 변신했다. ‘문화 권력’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문화 권력은 누구인가.

동아일보는 이달 초 문학 학술 대중문화를 비롯한 문화계 전문가 32명에게 ‘한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문화계 인물을 5명씩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가장 많이 거론된 이름은 15명의 추천을 받은 소설가 이외수 씨였다. 이어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9명), 소설가 공지영 씨(8명), 가수 싸이와 백낙청 교수(이상 7명),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소설가 황석영 씨(이상 6명), 김지하 씨와 소설가 이문열, 지휘자 정명훈 씨, 이미경 CJ E&M 총괄 부회장(이상 5명) 순이었다.

‘2012 대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문화계 인물’로는 김지하 씨와 이외수 씨가 각각 15명의 추천을 받아 1위를 기록했다. 3위 공지영 씨(9명), 4위 백낙청 교수(8명), 5위 박명성 신시뮤지컬컴퍼니 대표(5명), 6위 시인 안도현 씨(4명), 그리고 공동 7위는 3명씩의 추천을 받은 김어준 딴지일보 발행인, 시인이자 민주통합당 의원인 도종환, 영화배우 문성근, 소설가 황석영 씨, 정권교체를 바란다는 광고를 냈던 한국작가회의 젊은 문인 137명이었다.

한국사회에 영향력 있는 문화계 인사 상위 11명 가운데 이외수, 공지영, 백낙청, 황석영, 이문열, 김지하 씨 등 6명은 실제로 대선 과정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 중 김지하, 이외수, 이문열 씨는 박근혜 정부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주요 인물로 꼽혔다.

문화권력의 대표 주자들이 문학 쪽에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문화권력 이전에 ‘문학권력’ 논쟁이 치열했던 과거와 관계가 있다. 그래서 문화권력을 이해하려면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문학권력 논쟁을 들여다봐야 한다.
▼ 권력에 맞섰던 창비사단, 권력 기획자가 되다 ▼

창비, 백낙청, 그리고 문학권력 논쟁

1999∼2002년 벌어진 문학권력 논쟁은 문학계에 만연한 패권주의와 정실주의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는 정치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는 담론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시스템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했다. 당시 순수 문학을 지향하던 문학과지성사의 김병익 상임고문, 문학평론가 김윤식, 소설가 이문열 씨도 문학권력 논쟁의 대상이 됐지만, 좌우 양쪽 진영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참여문학을 주장하는 창작과비평사(창비)와 백낙청 교수였다.

창비는 1966년 미국 브라운대와 하버드대에서 석·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백 교수가 28세에 창간했다.

이 계간지는 다른 순수 문예지와 달리 창간호부터 문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시사, 정치 논문도 함께 실어 예술의 현실참여를 주창하는 아지트 역할을 했다. 창비는 분단체제론, 민족문학론, 리얼리즘론, 동아시아론 등의 담론을 주도해 나갔다. 리영희 한양대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도 이곳에서 나왔다.

창비는 편집자들의 심사를 통해 이념에 맞는 문인을 등단시킴으로써 이른바 ‘창비 사단’을 구축해나갔다. 김수영, 신동엽, 신경림, 고은, 김지하, 곽재구, 김정환, 김용택, 최영미, 천승세, 박완서, 이문구, 현기영, 황석영, 공지영, 방현석 씨 등 창비 사단은 한국 문단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힘이었다.

그러나 창비는 독재 권력에 저항하며 쌓아 온 상징자본과 영향력을 토대로 스스로 문단의 권력이 되는 모순적 상황을 보여주었다. “창비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담론은 백낙청의 비평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귀환하는 것이 한계이다.”(문학평론가 이명원) “창비 편집동인의 폐쇄적인 지도비평이 문학작품을 이론의 시녀로 만들었다.”(이경철 중앙대 겸임교수)

당시 계간지 편집주간을 맡았던 최원식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창비 산하 세교연구소 이사장)는 “권력이라고 하면 독재 권력만 생각했는데, 창비에 문학권력이라는 비판이 쏟아져 머리가 멍했다”고 회고한다.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던 창비 출신 인사들이 민주화 이후에는 정부 일각의 책임을 맡았던 경우도 있었다. 40년 전통이 쌓이다 보니 의도하지 않더라도 동아리주의, 패거리 짓기 행태를 보인 것은 아닌가 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스스로 권력이 된 창비는 장기적으로 이데올로기 담론을 통해 정치권력, 경제권력을 창출해내는 기획자가 됐다.

백 교수는 지난해 새해 벽두부터 ‘2013년 체제론’을 화두로 던졌다. 2012년의 총선과 대선을 한꺼번에 승리함으로써 낡은 ‘분단체제’와 ‘87년 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시민사회단체 원로들로 구성된 원탁회의를 이끌며 4·11총선 야권연대, 안철수-문재인 대선 후보단일화 협상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런 백 교수를 보며 이문열 씨는 “백 교수가 예전에는 문학권력으로서 유령처럼 배회했는데, 지난 대선 기간에는 백주대낮에 정치 컨설턴트를 자임하고 나섰다”고 쓴소리를 했다.

그러나 2013년 체제는 오지 않았다. “총선에서 지면 대선도 진다”던 백 교수의 예언은 적중했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2013년 체제론은 백 교수가 수십 년간 주장해 온 ‘분단체제론’의 연장에 불과했다”며 “객관적인 삶의 현실은 반영하지 못하고, 단순히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는 당위성만 강조함으로써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고 평했다.

선거 이후 창비의 표정은 밝지 않다. 선거에 패배한 야당 못지않게 반성의 목소리가 높다. 창비 봄호의 대선 평가 특별좌담 ‘2012년과 2013년’에서 백 교수는 “‘희망 2013’은 방식을 달리하더라도 계속 추구해야겠지만 ‘2013년 체제’라는 명칭은 포기할 용의가 있다”고 인정했다.

“2013년 체제론이란 게, 2012년 선거에 이기고 2013년에 새 정부 출범시키면서 확 다 바뀐다는 논리는 아니었다. 2013년 체제 ‘만들기’를 목표로 논의를 펼친 것이고, 총선을 못 이겼으면 대선이라도 이기자고 중간에 수정까지 했던 건데, 완전히 틀린 얘기가 됐다. ‘완전히’라고는 안 해도 2013년 체제라는 용어를 쓰기가 난감할 정도로 어긋나버렸다. 일부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든가, 성찰할 지점이 많다고 본다.”

최원식 교수는 “2012년 대선이 우리 사회의 전환점이 되리라고 기대했는데, 실패했던 것은 개혁 진보세력이 어떤 ‘회로’에 갇혀 있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창비 산하 세교연구소는 신년총회에서 올해의 키워드를 ‘소통과 쇄신’으로 꼽았다. 창비와 다른 의견을 가진 보수층 및 대중과의 소통 채널을 마련해 쇄신하겠다는 다짐이다. 마치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의 새해 약속처럼 들리는 것은 왜일까.

‘나꼼수’의 김용민 주진우 김어준 정봉주 씨(왼쪽부터). 동아일보DB
‘나꼼수’의 김용민 주진우 김어준 정봉주 씨(왼쪽부터). 동아일보DB
나꼼수, 대중문화 시대의 문화 권력, 그리고 ‘국민TV’

문학의 시대가 가고 영상의 시대가 오면서 문화 권력 지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속칭 ‘딴따라’들이 가공할 위력으로 사회 문제를 제기하고 투표를 독려한다. 배우 김여진 씨가 아니었으면 한진 중공업 사태가, 차인표 씨가 아니었으면 탈북자 인권문제가 평범한 사람들의 관심사가 될 수 있었을까.

그중에서도 새로운 매체인 인터넷에 힘입어 가장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가장 처참하게 추락한 문화 권력은 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나꼼수)’다. 문화계 전문가들이 지난 대선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문화계 인물로 꼽은 이들 가운데 7위가 나꼼수 진행자 김어준 딴지일보 발행인이다.

이들은 정권 교체를 위해 전력투구했다. 선거가 끝난 뒤에는 대선기간 중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새누리당과 선거관리위원회, 국가정보원으로부터 10여 건의 고소를 당했다. 야권에선 “나꼼수에 너무 기댄 것이 패인”이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나꼼수는 ‘해외도피’ 중이다. 진행자인 김어준과 주진우 씨, 나꼼수의 전국 투어 콘서트 기획자인 탁현민 씨 세 사람은 대선 직후인 12월 22일 유럽으로 날아갔다. 지난해 12월 성탄절 특사로 풀려난 나꼼수 진행자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은 “나꼼수의 유통기한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속사정을 아는 이들은 “나꼼수는 죽지 않았다. 나꼼수의 근황이 궁금하면 ‘벙커1’로 가보라”고 귀띔했다.

13일 오후 7시 반 서울 종로구 대학로 정미소 소극장의 지하에 자리 잡은 ‘벙커1’을 찾았다. ‘벙커1’은 나꼼수 멤버가 새롭게 마련한 정치학습 강연장이다. 평일 저녁인데도 20, 30대 청중들이 200석 규모의 객석을 빼곡히 채웠다.

이날의 강사는 문재인 민주당 후보 대선캠프에서 TV광고를 주도했던 카피라이터 정철 씨였다. “죄송하고, 미안하고, 반성해야 할 사람이 강연하는 게 맞는가 해서 주저했습니다. 실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끝은 시작이다’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 강연을 하게 됐어요.” 그는 총선과 대선에서 선보였던 문 후보의 광고캠페인 동영상을 청중과 같이 보면서 말했다. “결과가 정의롭지 않았지만, 지난 1년간은 정말 행복했고 후회가 없습니다.”
▼ “정치는 52:48… 문화는 10:90 좌파 압도” ▼

평일 저녁 ‘벙커1’에선 정치 시사 예술 분야의 다양한 강의가 펼쳐진다. 일요일 오전에는 나꼼수 멤버이자 지난해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했던 김용민 씨가 주재하는 ‘벙커1 교회’가 열린다. ‘벙커1’의 안내문은 이렇다. “MB정권 5년간 각개 전투로 병력을 소진한 아군들을 위해 개설한 마지막 진지이다. 함께 견디며 힘을 모으기 위해 비상시에는 작전을 수립하고, 평시에는 사기를 충전하는 다목적 복합기지의 기능을 수행한다.” 안내문에는 ‘잠입하는 길’ ‘보급품’ ‘위문공연’ 같은 군사용어가 많다.

나꼼수가 만든 학습공간이 ‘벙커’, 즉 진지(陣地)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시자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의 ‘문화진지론’을 떠올리게 한다. 그람시는 “시장경제 시스템은 자본과 경찰과 군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주류 제도권이 이끄는 ‘문화적 헤게모니’에 의해 유지된다. 주류문화에 대항해서 공격하는 ‘문화진지’를 구축해 ‘진지전’을 전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유럽 같은 자본주의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제정 러시아처럼 군대와 경찰을 직접 공격하는 ‘기동전’에 의한 혁명은 불가능하며, ‘진지전’을 통해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해야 한다는 논리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도 사회운동 세력은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문화진지를 더욱 공고히 구축해 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 공연기획자이자 방송 진행자인 탁현민 씨다. 그의 활약상을 보면 각계의 진보 인사들이 어떻게 연결돼 사회 정치적 힘을 발휘하는지 알 수 있다. 참여연대에서 사회운동을 했던 그는 방송인 김제동 씨와 가수 윤도현, 김C, 정태춘 씨 등이 소속돼 있는 다음기획에서 일하면서 공연연출가로 유명해졌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추모공연 ‘다시 바람이 분다’를 기획했던 그는 나꼼수 공개 방송과 김제동의 토크콘서트를 연출하면서 정치시사 토크와 콘서트를 결합한 새로운 공연을 선보였다. 공연 때마다 조국 서울대 교수, 소설가 공지영과 이외수, 방송인 김미화, 가수 윤도현과 강산에, 만화가 강풀, 정연주 전 KBS 사장 등이 게스트로 초청됐다. 지난 대선에는 문재인 민주당 후보의 야외 유세를 총괄 기획했다. 시민단체, 나꼼수, 트위터, 연예계와 정계 인물을 엮어낸 탁 씨에게 민주당이 얼마나 기댔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통기한이 끝난’ 나꼼수는 지하 진지를 구축하고 재기를 준비하고 있다. 재기의 무기는 24시간 보도 중심 방송인 ‘국민TV’다. 김용민 씨가 낸 아이디어인데 MBC 파업 해직기자들이 만든 ‘뉴스타파’ ‘고발뉴스’와 ‘아프리카TV’ 등 각종 인터넷 방송을 셋톱박스를 통해 TV로도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 팟캐스트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같은 뉴미디어 대신 올드 미디어로 회귀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꼼수가 대선 패배 후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올드 미디어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 씨는 최근 서울 노원을 지역구 위원장직을 사퇴하고 국민TV 방송설립준비위원회를 이끌고 있다.

다음 달 3일 서울시 신청사 8층 다목적홀에서 ‘국민TV’ 발기인대회가 열린다. 이날 행사에는 대선 후 침묵에 빠졌던 진보 진영의 인사들이 대거 참가할 예정이다. 이달 6일엔 이곳에서 오마이뉴스가 주최한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의 특강도 열렸다. 5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이 홀은 요즘 진보 진영의 새로운 ‘문화진지’로 주목받고 있다.

1 대 9의 비밀, 진보 편향 부추기는 상업주의

창비와 나꼼수에서 보듯 올드 미디어와 뉴미디어 시대 모두 문화 권력은 진보가 대세다. 문화란 원래 기존 질서에 저항하면서 창조해내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어느 나라에서든 문화는 진보적이기 마련이다. 1960년대 미국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참가한 이들은 ‘상상력에 권력을!’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이문열 씨는 “지난 대선 결과만 보더라도 우리 정치 지형은 52% 대 48% 정도로 좌우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유독 문화계에서만 1 대 9 정도로 좌편향이 심하다. 이는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말대로 한국 문화 권력의 좌편향은 정도가 심하다. 이는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 당시 진보 진영의 문화투쟁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민족문학, 민중미술, 마당극 운동을 주도하던 진보 진영은 1990년대 초반 ‘KBS MBC 대파업’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 등 방송 및 영화계 운동에서도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반면 정치 및 경제 권력과 같은 기득권에 취해 있던 보수 진영은 문화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거꾸로 해석하면 기득권을 갖지 못한 진보 세력이 차지할 수 있었던 권력은 문화 권력밖에 없었다는 말도 된다.

특히 2000년대 후반 진보 인사들의 사회적 발언은 SNS의 도움으로 증폭됐다. 대중적 파급력은 막강해졌고 그들의 권력도 커졌다. 누적판매 1000만 부의 작가 공지영 씨와 배우 김여진 씨 등은 뉴미디어에서의 활발한 발언으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한진중공업 사태, 반값 등록금 논쟁, 홍익대 청소노동자 권익 문제 등을 주요 의제로 설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노동운동이 진보 진영의 명망가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심화되자 ‘노동 없는 노동운동’이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영화계에서는 대중문화계를 장악한 진보 세력이 거대 자본의 상업주의를 만나 더욱 커진 측면이 있다는 말이 나온다. 이는 보수 색깔의 영화를 제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김학순 감독은 2002년 발생한 제2연평해전에 관한 영화를 7년째 찍고 있다. 2006년부터 이 영화를 준비해 온 김 감독은 2012년 제2연평해전 10주년에 맞춰 그해 6월 말 개봉할 예정이었다. 해군본부의 지원을 받아냈고 주연 배우 정석원(고 윤영하 소령 역)도 캐스팅했다. 문제는 60억 원의 제작비. CJ E&M,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등 영화계 메이저의 문을 두드렸지만 모두들 난감해했다.

“대기업들이 정치권 눈치를 심하게 보는지 ‘이 영화를 지원했다가 정권이 바뀌면 부담감이 클 것 같다’ ‘대선 결과가 나온 후에 보자’고 하더군요. 투자를 약속했던 한 창업투자사는 대선 직전 ‘정권이 바뀌면 (이 영화에 투자했다는 사실 때문에) 주가가 떨어질 것 같다’며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제2연평해전을 소재로 한 영화는 예전에도 여러 편 기획됐었다. 2009년 곽경택 감독은 현빈 주진모 이정진 씨를 내세운 ‘아름다운 우리’ 제작계획을 발표했고, ‘튜브’의 백운학 감독도 ‘연평해전’ 촬영 계획을 밝혔으나 두 편 모두 기업투자를 끌어내지 못해 제작이 무산됐다.

결국 김 감독은 진보 진영이 독점해온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인터넷 등을 통해 십시일반 소액 자금을 모아 필요 재원을 조달하는 방법)’에 기대기로 했다. 인터넷 ‘굿펀딩’을 통해 모금을 하고 있는데 10일까지 한 달간 모금 실적은 1억 원, 목표액은 15억 원이다.

이런 딱한 처지는 지난해 대선을 앞둔 11월 말 개봉한 영화 ‘26년’과 비교된다. 강풀 원작의 ‘26년’은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유가족들이 가해자를 직접 응징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지난해 6월부터 4개월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약 7억 원을 모아 제작돼 관객 290만 명을 끌어모았다. 같은 시기 고 김근태 민주당 고문의 생애를 다룬 영화 ‘남영동 1985’도 순조롭게 제작돼 극장에 걸렸다. 이 영화의 정지영 감독은 시사회에서 “나쁜 과거사의 한 단면을 들춰낸 이 영화가 대선에 영향을 끼쳤으면 좋겠다”고 솔직한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보수 성향의 영화가 투자와 제작 단계부터 어려움을 겪는 일은 되풀이되고 있다. 영화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웰컴 투 동막골’ ‘간첩 리철진’ ‘의형제’ ‘베를린’까지 북한을 가족, 형제, 연인으로 묘사한 영화들은 대체로 흥행에 성공했다. 반면 차인표 주연의 탈북자 영화 ‘크로싱’이나 남한 전투기가 북한을 직접 폭격하는 ‘알투비’ 등은 투자받기도 어렵고, 개봉하더라도 흥행 실적도 낮다.

영화평론가 심영섭 씨는 “한국영화 속에 비치는 북한 이미지는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동화 속 판타지와 같다”고 분석한다. “김대중 정부 이후 남북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탈북자 북송, 정치범수용소 같은 문제는 외면됐다. 영화 속에서도 북한 사람들은 점점 코믹한 휴머니즘을 가진 캐릭터로만 희화화되고 있다. 상업영화의 기본 속성은 아픈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보다는, 관객들이 바라는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희문 인하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는 “영화계에서 제작, 투자, 배급까지 독점하고 있는 CJ엔터테인먼트는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으로 뭉쳐온 영화인들로부터 언제든 공격을 당할 수 있는 취약한 존재”라며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개봉했던 영화 ‘화려한 휴가’ 등 그동안 CJ가 제작투자해온 작품 리스트를 보면 진보 진영의 눈치를 얼마나 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種 다양성’ 위해선 보수의 문화혁신 필요

이명박 정부는 취임 직후 방송 공연 영화 출판 등 문화예술계의 단체장을 대거 바꿔 문화 권력의 좌우 균형을 이루려고 애썼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거나 단체장이 바뀐다고 문화계를 움직이는 실제 권력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예술단체장을 맡았다 노조의 반발로 사퇴한 한 인사는 “마치 개미굴에 혼자 빠진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노무현,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단체장이 바뀌다 보니 정치권에 줄을 대려는 ‘예술 정치꾼’만 늘어났다.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민주화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문화 분야는 이쪽 때려잡고, 저쪽 도와주면서 오히려 사회갈등을 확대해왔다”며 “박근혜 당선인이 ‘국민 모두가 행복한 100% 대한민국’을 내세운 만큼 이념보다는 창의성을 우선하고 국민통합을 상징하는 문화정책을 펴 나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21세기의 치열한 문화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문화계 내부에서 ‘종의 다양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이를 위해서는 진보 진영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에 소홀했던 우파의 자기혁신이 시급하다는 진단이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조선의 사대부나 현대 서양의 지도층은 인문적 예술적 소양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가치를 키워오는 데 많은 노력을 해왔다”며 “문화 권력의 좌우 불균형은 정치권력의 힘으로는 해소할 수 없으며 보수층 스스로 문화적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성현 연세대 이승만연구소 객원연구원은 보수 세력에 다음과 같이 자문해보기를 제안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주류 문화에 대한 저항의 진지로서 ‘문화진지론’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과연 대한민국의 주류 제도권은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문화적 가치를 마련해 본 적이 있는가.”

전승훈·황인찬 기자 raphy@donga.com

[채널A 영상] 신천지-굿판…나꼼수 이번에도 ‘의혹 제기’에 앞장
[채널A 영상] 숫자 1과 9로 풀어본 2012년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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