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한국 문화계에서 우파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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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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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수석논설위원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얼굴을 한 마네킹의 목이 갑자기 칼로 베어진다. 마네킹의 상반신에는 ‘한나라당’이라고 쓰인 어깨띠가 걸려 있다. 목이 있던 곳에서 피가 솟구치고 주변에는 선혈이 낭자하다. 이명박 박근혜를 풍자했다는 영화 ‘자가당착’의 한 장면이다. 영상물등급위원회는 이 영화를 ‘제한상영가’로 결정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현저하게 훼손하고 국민 정서를 손상할 우려가 높다’는 것이 이유였다. ‘제한상영가’로 분류되면 국내 상업 영화관에서는 상영이 불가능하다. 제한상영가 전용극장에서 상영할 수는 있으나 국내에는 전용극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야당 국회의원들은 이 영화에 대해 ‘표현의 자유’ 쪽으로 손을 들어주었다. 민주통합당 유승희 의원은 “영상물등급위원회의 결정은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심대하게 침해한 것”이라며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들을 질책했다. 같은 당 윤관석 의원은 “박근혜의 미래 권력과 관계가 있다”며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정치적 판단을 했다고 비판했다. 이 영화 제작자는 서울행정법원에 ‘제한상영가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해 놓고 있어 앞으로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게 됐다.

정치인을 소재로 한 창작물 가운데 이 사례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지난해 5월 새누리당의 이준석 비대위원이 페이스북에 올렸던 ‘문재인 참수’ 웹툰(인터넷 만화)이다. 중국의 삼국지를 다룬 이 만화에는 문재인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의 목이 베어진 장면이 있었다. 이준석 비대위원은 누리꾼들의 힐난이 쏟아지자 바로 사과문을 올렸고, 문재인 고문을 직접 만나 사과하기 위해 공항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이 만화를 만든 사람에 대한 비난도 이어졌다. 대선 과정에서 문 후보를 도왔던 조국 서울대 교수는 “원작자의 정신 상태가 궁금하다”고 트위터에 올렸다.

두 창작물을 비교하면 영화 ‘자가당착’ 쪽이 묘사의 강도 면에서 더 심해 보인다. 그러나 야권은 박근혜를 다룬 영화 ‘자가당착’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거론하며 옹호했지만 ‘문재인 참수’ 만화에 대해서는 야당 지도자에 대한 모독을 내세웠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중 잣대다. 문화계와 인터넷 공간에서도 같은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 문제를 새삼 꺼내는 이유는 연극 ‘한강의 기적’ 때문이다. 극단 민중극단은 내일부터 24일까지 이 작품을 공연하기로 하고 한 달여 동안 연습을 진행하고 있었다.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등 세 인물을 등장시켜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을 그린 작품이다. 극단 측이 공연장으로 잡아놓은 곳은 정부가 사실상 운영 주체인 서울 대학로의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이었다.

하지만 한 연극인이 지난달 28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공공기관이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극장에서 이런 작품을 공연해도 되느냐’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어 연극계 안팎에서 25일 대통령에 취임하는 박근혜 당선인을 거론하며 ‘새 정부 출범에 맞춘 박정희 미화 연극’ ‘용비어천가 연극’이라고 비판한 뒤 극장 측이 대관 취소 결정을 내렸다. 반대 움직임이 없었더라면 연극은 예정대로 진행됐을 것이다.

예술 작품이 공공 문화시설에서 배척당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1980년 10월 같은 일이 있었다. 연극이 아닌 미술 분야였다. 사회 현실에 비판적이었던 젊은 화가들이 문화부 산하 전시시설인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현실과 발언’이라는 전시회를 가지려다가 ‘전시 불가(不可)’ 조치를 당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1980년에는 민주화세력이 탄압을 당했고, 이번에는 문화계 우파 세력이 거리로 내쫓겼다.

이번 공연은 아직 막이 오르지도 않은 상태다. 제목이나 제작 취지만 보고 ‘박정희 미화 연극’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불합리하다. 극장 측 대응도 납득할 수 없다. 논란이 벌어지자 ‘시끄러운 일은 일단 피하고 보자’는 공공기관 특유의 무사안일 정신이 작동했다. 극장 측은 ‘절차상 오류’를 대관 취소의 사유로 내세웠으나 민중극단 측은 극장 측의 요구에 따라 절차를 진행했다고 한다. 극장 측도 이 사실을 시인했다. 책임 소재를 따진다면 극장에 잘못이 있다. 여러 근거를 댈 필요도 없이 이 작품이 밉보인 것은 ‘박정희를 다룬 연극’이기 때문이다.

진보 쪽에서 만든 연극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야권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무기 삼아 정부를 상대로 맹공을 퍼부었을 것이 분명하다. 연극인들은 자신들의 권리가 침해당한 이번 사태에 함께 분노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이 연극에 처음 이의를 제기한 것은 외부 사람이 아닌 한 연극인이었다. 연극계에서는 이 작품을 옹호해주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보수 진영의 소설가 이문열 씨는 최근 “일반 국민은 보수와 진보가 50 대 50이지만 문화 쪽은 진보가 거의 98%까지 장악하고 있다”면서 “문인들은 보수색(色)을 드러내는 즉시 불이익을 당한다”고 토로했다. 이번 일은 문화계 좌파 진영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정부 기관조차 눈치를 볼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반면 문화계에서 우파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제 상당한 용기와 각오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됐다. 진보 쪽 문인 공지영의 길보다는 보수 쪽 김지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어려울 수 있다. 다양성이 생명인 문화계에 ‘단색(單色) 문화’가 초래할 후유증이 두렵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한국 문화계#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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