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다함께 1부/당당히 일어서는 다문화 가족]<1>결혼이주여성들의 활약 그리고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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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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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의원-교수-공무원으로… “한국위해 일할 수 있어 행복해요”

한국의 주류로 떠오르는 결혼이주여성이 늘고 있다. 국제결혼 10여 년 역사 만에 달라진 모습이다. ‘다문화 정치인 1호’로 활동하고 있는 몽골 출신의 이라 경기도의원(왼쪽 사진의 오른쪽), 베트남 출신의 국제대 외국인 교수 전정숙 씨(가운데 사진), 베트남 출신의 서울시 공무원 팜튀퀸화 씨(오른쪽 사진).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팜튀퀸화 씨 제공
한국의 주류로 떠오르는 결혼이주여성이 늘고 있다. 국제결혼 10여 년 역사 만에 달라진 모습이다. ‘다문화 정치인 1호’로 활동하고 있는 몽골 출신의 이라 경기도의원(왼쪽 사진의 오른쪽), 베트남 출신의 국제대 외국인 교수 전정숙 씨(가운데 사진), 베트남 출신의 서울시 공무원 팜튀퀸화 씨(오른쪽 사진).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팜튀퀸화 씨 제공
《 결혼이주여성 출신인 이자스민 씨(34·여)의 19대 국회의원(새누리당·비례대표) 당선은 대한민국 다문화 역사에서 새로운 이정표가 됐다. 본격적인 국제결혼 역사가 10여 년에 불과한 현실을 감안할 때 이 씨의 국회 입성이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실로 크다. 물론 아직도 가정폭력이나 무관심, 사회적 고립 등 사각지대에 놓인 결혼이주여성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씨처럼 대한민국 주류 사회에 진입해 성공시대를 열어가는 사례도 분명 늘어나고 있다. 성공을 꿈꾸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 ‘다문화 정치인’으로 살아온 2년

이 씨보다 먼저 ‘다문화 정치인’의 타이틀을 얻은 이라 경기도의원(35). 지방의회와 국회라는 차이가 있지만 2년간 한국 정치를 경험한 선배 정치인이다. 몽골 출신의 그는 2003년 결혼해 한국에 왔고 2008년 국적을 취득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경기 성남에서 성을 따 ‘성남 이씨’로, 이름은 부르기 편하도록 외자로 지었다.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 경기도의원 비례대표 후보 1번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현재 경기도의회 여성가족평생교육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평범한 ‘외국인’ 주부였던 그의 삶은 달라졌다. 거의 매달 진행되는 의사일정을 소화하느라 눈코 뜰 새 없다. 1년 내내 임시회와 상임위 활동, 정기회와 행정사무감사, 당내 일정이 이어진다. 그는 “처음에 비해서는 많이 적응했다. 이제는 일을 하면서 학교 공부까지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강남대에 편입해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다.

여야 간에 또는 같은 당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경우가 많고 심하면 몸싸움까지 벌어지는 한국 정치. 그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까. 신중함과 소통이 원칙이란다. 그는 “평소보다 더 신중하게 처신하려 한다. 여러 번 묻고 두세 번 듣는다. 서두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꼼꼼하게 하면 실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치인이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 의원은 “의정활동을 통해 다문화뿐 아니라 한국 사회를 보는 시각이 넓어졌다”며 “다문화가정도 당장 돕는 것 못지않게 멀리 보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 ‘베트남댁’, 대학 강단에 서다

전정숙 씨(38)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것은 2002년 5월. 한국 사회에서는 다문화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던 시기였다.

전 씨가 살던 경기 안성시는 물론이고 주변에도 변변한 한글교실 한 곳 없었다. 한국에 오기 전 ‘엄마’라는 한 단어만 배워온 전 씨는 독학으로 한글을 익혔다. 남편과 시어머니로부터 한국음식 요리법 등 살림을 배우면서 말과 글을 늘렸다. 다행히 모국에서 4년간 중학교 영어교사를 한 경험이 있어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전 씨는 자신의 경험을 다른 결혼이주여성을 돕기 위한 자양분으로 활용했다. 다문화에 대한 인식이 일반화되면서 곳곳에 다문화가족지원센터나 지역복지관이 들어섰다. 그는 시설들을 찾아다니며 통역과 번역 봉사활동을 했다.

살림과 육아, 봉사활동까지 하는 틈틈이 공부를 해 미용 재봉틀 컴퓨터 등 각종 자격증도 땄다. 2006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2년 뒤에는 평택대에 편입해 디지털응용정보학을 공부했다. 이어 대한민국 다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위해 2010년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2년간 다문화가족복지를 공부했다.

올 2월 평택에 있는 국제대에서 베트남 중국 등 5개국 출신 외국인 교수(전임강사)를 공개 채용했고 전 씨는 당당히 합격했다. 국제대 대외협력처 안병준 팀장은 “초기 다문화가정 출신 학생들이 조만간 대학에 진학할 것을 염두에 두고 채용했다”며 “다른 대학을 모두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결혼이주여성이 정식 대학 교원이 된 사례는 처음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전 씨는 요즘 2학기 강의 개설을 준비하며 학생과 교직원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고 있다. 그는 “이민자, 다문화가정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보다는 그들이 사회에서 공정하게 경쟁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러려면 배움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탁월한 사람은 차별받지 않는다”

팜튀퀸화 씨(32·베트남)는 서울시 소속 공무원이다. 지난해 7월부터 시청 외국인생활지원과에서 일하고 있다. 서울 중구 명동에 위치한 서울글로벌문화관광센터 지원이 그의 업무다. 2005년 결혼과 함께 한국에 온 그는 현재 서울대 국어교육과에서 석사 과정도 밟고 있다. 팜 씨는 “지난해 공무원 채용 공고를 보고 ‘나도 한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 ‘다문화가정 여성의 목소리를 정책에 담아보자’ 결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한 장짜리 공문서 만들기도 쉽지 않았고 민원인을 대할 때마다 걱정이 앞섰다. 개인별 성과를 내고 평가를 받는 시스템에 익숙해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는 “정말 공무원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며 “국민이 낸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다는 공공마인드가 강해 늘 조심스럽다”고 털어놨다.

남들은 느끼지 못하는 편견도 이겨내야 했다. 동료들은 모두 따뜻했지만 일부 민원인은 여전히 ‘의아하다’는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심지어 “개나 소나 공무원 하느냐”는 비아냥거림도 전해 들었다. 팜 씨는 “국적보다 개인을 먼저 봤으면 좋겠다”며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열심히 살아온 사람은 인정해줘야 한다”고 항변했다.

그래도 한국의 다문화 수준은 매년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다문화를 받아들이는 대중의 시선이 훨씬 자연스러워졌고 아시아 각국에서도 학력 높은 인재들이 한국을 찾고 있다. 사회 진출을 원하는 결혼이주여성도 늘고 있다. 팜 씨는 이런 여성들에게 늘 “관심 분야에서 전문가가 돼라”고 조언한다. 평소 경험에서 우러난 ‘탁월한 사람은 차별받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팜 씨는 “처음 맡은 업무는 외국인 밀집지역 모니터링과 의견 수렴 정도였지만 계속 공부하고 전문성을 쌓자 다른 업무까지 돌아왔다”며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전문가가 돼야 당당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수원=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 이주여성 취업률 37%… 평균임금 月 108만원 ▼


국내 다문화가정이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이후부터다. 그전까지만 해도 결혼이주여성은 한국 사회에서 차별받는 소수자였다. 따로 통계도 잡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결혼한 부부 10쌍 가운데 1쌍이 다문화가정일 정도로 결혼이주여성은 급증했다.

국회의원, 교수, 공무원 등 한국 사회 주류로 진입하는 결혼이주여성도 생겨났다. 지역 사회에 관심을 갖고 봉사에 나서는 결혼이주여성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이 우리 사회의 중요 구성원으로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혼이주여성들은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서려면 ‘자립’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특히 다문화가정의 대다수 출신국가인 중국이나 동남아는 한국보다 여성 취업률이 높기 때문에 결혼이주여성이 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

그러나 2009년 다문화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일하는 결혼이주여성의 비율은 36.9%로, 한국 여성보다 20%포인트가량 낮았다. 일자리의 질도 좋지 않다. 서비스직이 29.4%, 단순 노무직이 18.6%였으며 평균 임금은 108만 원이었다.

취업에 성공한 결혼이주여성들은 “정말 한국인이 된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복지 대상자일 땐 몰랐는데 자립하고 세금을 내면서 떳떳해졌다는 것이다.

쉬리 씨(34)는 인천 강화군 강화중학교에서 과학보조교사로 2년 동안 일했다. 한국건강가정진흥원의 강화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통해 일자리를 알선받았다. 빚도 갚고 적금도 부으면서 경제적 안정을 찾는 기쁨도 컸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생겼다는 게 더 기뻤다고 한다. 한국에서 외국인이 공장이나 식당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나 통역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은 요즘 쉬리 씨를 소개할 때 “이사람 선생님이에요”라는 말부터 한다. 이웃들의 시선도 전보다 따뜻해졌다.

의료관광코디네이터로 활동 중인 유쿠타케 미나코 씨(42)는 부산 사상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통해 의료관광코디네이터 과정을 수료한 뒤 취업에 성공했다. 일본인 관광객이 병원을 찾으면 접수 상담 치료 수납의 전 과정을 도와준다. 한국에 온 지 10년이 지났지만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일을 하면서 가족 간의 유대가 더욱 돈독해졌다. 초등학생 자녀가 엄마를 자랑스러워하기 시작했고, 남편과의 대화거리도 풍성해졌다.

고선주 한국건강가정진흥원장은 “결혼이주여성들이 일을 하게 되면 자존감을 회복하는 동시에 한국 사회에 좀 더 빨리 적응할 수 있다”며 “한국어에 능숙해지고 자신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자원봉사 등 사회 참여 활동을 통해 이런 능력을 길러가는 것도 좋다”고 조언했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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