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영화의 순교자가 되려 하는가?
●구애의 표시인가 아니면 절망의 절규인가?
●지나치게 과격한 자기성찰은 또 다른 폭력일 수도
세계적인 영화감독 '김기덕(51)'을 수식하는 표현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비주류, 동물적 감각, 독선적 행동, 논쟁적 소재, 폭력의 미학, 마초이즘 등…. 국내 영화계에서 강인하되 부정적인 수식어는 온전히 그의 차지였다. 제대로 된 학교를 나온 적도 없고 영화계에 후견인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해병대 출신의 못 배우고 가난한 영화감독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누구도 그의 존재감을 무시하지 못한다. 1996년 '악어'로 데뷔한 이후 15년, 그는 15편의 '김기덕 브랜드' 영화를 만들어 내며 대한민국 영화감독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한 세계 유수영화제 감독상을 연달아 수상해왔기 때문이다.
전 세계 거의 모든 도시에서 그의 영화가 상영됐고, 세계적 평론가들은 그를 향해 "폭력의 미학" "인간의 본질" "동양적 깊이"라는 수식을 어를 쏟아내며 극찬했다. 그는 마치 폭주기관차처럼 쉴 새 없이 자신이 바라본 한국사회의 모순을 스크린에 담아냈다. 그는 언제나 찬사와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영광의 순간은 짧고 냉담의 시간은 길었다. 그를 칭송하는 관객은 많았지만 그런 평가가 그를 영화계의 주류로 격상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천성이 '아웃사이더'였다. 투자자는 그를 외면했고 영화계는 그의 작품은 인정했으되 권위는 부여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의 끝에서 그가 '아리랑'이란 낯선 자전적 영화로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드러내고 국내 영화계를 조롱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 작품은 국제영화계로 신속하게 전파됐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저주받은 걸작'이 되어버렸다. '아리랑'은 도대체 어떤 영화일까?
"나, 진짜로 영화 만들고 싶어. 시나리오는 다 써놨어. 6.25 전쟁 때 불가피 하게 사람을 죽여 암매장하고 미국으로 떠났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한 미군에 대한 영화야…정말 만들고 싶은데 찍지 못하고 있어…"<영화 '아리랑' 가운데>
영화 '아리랑'에 대한 사전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후배 영화인에 대한 감정의 폭발"이라는 감상평이 지난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을 통해 흘러나왔다. '진짜 그럴까?' 이 같은 단순한 메시지를 담은 영화가 세계 유수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국 개봉은 꿈도 꾸기 힘든 일이었다. 마지막 가능성은 '영화제'를 통해서였다. 그 기회가 8월19일과 20일 강남구 압구정동 CGV에서 진행 중인 서울디지털영화제(CINDI) 자리였다. 많은 영화인들이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모여든 이유다.
■거장의 전원일기? No…그는 1인 시위중
차가운 겨울, 수도권 시골 마을(아마도 경기도 파주가 아닐까 싶다)에 자리한 개량 농가가 주된 배경이다.
영화의 타이틀 '아리랑'이 올라가면 한 '독거노인'이 등장해 침묵으로 일관된 자신의 일상을 펼쳐 보인다. 아침에 일어나 먹고, 자고, 싸고, 놀고 다시 먹고, 자고, 싸고, 논다. 언뜻 보면 농한기를 맞이한 농촌 노총각의 일상을 보는 것 같다. 물론 이 영화의 주인공은 널리 알려진 대로 '김기덕 감독'이다.
군복바지에 머리는 이미 치열하게 흐트러졌다. 아침엔 눈 녹은 물로 세수를 하고 장작을 패서 난로를 피워 라면을 끓여먹는다. 잠시 한가해지면 주위 농지를 정리하거나 자작한 커피머신으로 한가롭게 커피를 마신다. 다시 밤이 되면 혹독한 추위를 피하기 위해 방 안에 설치한 텐트 안으로 들어가 과거에 자신이 만든 영화를 돌려본다.
영화시작 후 20여분은 '김 감독'의 반쯤은 고독하고 반쯤은 호젓해 보이는 전원생활을 조망할 뿐이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고민 없이 한국사회의 경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아웃사이더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어 침묵을 깨는 순간 '전원드라마'는 순식간에 '심리드라마'로 전환된다.
"야! 시골에 처박혀 텐트 하나 치고 사니까 좋냐? 너 폐인 됐다고 기사 나왔어"
물론 그에게 이런 말을 걸어줄 친구나 선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모노드라마다. 결국 김 감독이 스스로에게 말을 걸고 답을 하는 '모노드라마' 구조다. 그는 어째서 사진이 이렇게 은거하고 있는 이유를 끊임없이 관객에게 설명한다.
"야, 김기덕! 너 왜 영화를 찍지 못하니? 2008년부터 3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 영화를 찍지 못하고 있어! 영화를 찍고 싶은데 찍는 법을 잊어버렸어. 그래서 내가 날 찍는다고"
"사람들이 너를 동정하고 있잖아… '비몽' 찍을 때 여배우가 목매달려 사고로 죽을 뻔해서 그런 거야? 아니면 네 후배가 너를 배신하고 떠나서 그런 거야?"
그의 입은 거침이 없다. 반쯤 취한 듯한 목소리에는 욕설과 회한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이제까지 자신이 썼던 시나리오 보다 더욱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인다. 관객들은 잠깐씩 그의 1인극에 웃기도 하다가 이내 심각해진다. 세계적인 감독이라는 '김기덕'의 처지가 무척이나 안쓰럽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짧은 머리 야구모자 그리고 과격한 영화...김기덕은 한국 영화계의 이단아지만 전세계적으로 가장 사랑 받는 한국작가다. 동아일보 DB
■짧은머리, 야구모자, 그리고 해병대 출신…
사실 이 영화의 성격은 애매모호하다.
자신의 홍보영화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풀이 영화로 비치기도 한다. 조감독 생활을 하다가 떠나가 버린 후배에 대한 마조히스트적인 공격으로 보이고, 영화 막판에는 '유서(遺書)'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스스로의 감정을 폭발시킨다.
일견 자신을 배반한 후배영화인 '장훈' 감독에 대한 비난으로 비치는 대목이 있었다. 장 감독은 '의형제'로 이름을 높이고 최근 CJ가 대규모로 투자한 '고지전'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실력파 감독이다. 그는 김 감독에게 영화를 배웠지만 대형 투자자가 영입을 제안하자 미련 없이 김 감독을 버리고 떠났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그런 과거가 있다고 해서 '아리랑' 전체를 반드시 스승과 제자의 신경전으로 해석할 일도 아니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김 감독은 한국영화계의 '비주류 중의 비주류'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지지하는 젊은이들 가운데는 장훈 감독처럼 그의 제자가 된 이들도 적지 않다.
자신이 키운 제자만큼은 김 감독의 유일한 희망이자 강고한 지지자들이었다. 이들에게는 돈도 백도 없지만 힘을 합치면 '김기덕 사단'으로 불릴 정도의 독자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시나브로 자라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끼던 제자가 떠나면서 그런 희망아 상당 부분 사라진 것이다. '아리랑'은 후배에 대한 질책이라기보다는 그런 상황이 닥쳐도 어찌할 바 없는 중견감독 스스로에 대한 질책이자 회한으로 비쳤다. 영화에서 그는 "인간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를
최근 김 감독은 새로운 제자인 전재홍 감독과 단 2억원의 저예산으로 '풍산개'라는 작품을 만들어 내 100만 관객이라는 신화를 기록했다. 상당한 용기를 얻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게 이해를 하더라도 '아리랑'은 김 감독을 지지하는 관객이 보기에도 복잡한 감정을 전달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 칸에서 기자는 두 가지 이미지가 떠올랐다.
첫 번째는 최근 한국프로야구계의 논란의 중심인 '김성근 감독'이다.
SK 와이번즈 김 전 감독 역시 김기덕과 비슷한 존재감이지만 상대적으로 불안한 위상이다. 자신의 야구를 위해 죽을지 언정 자존심을 포기하는 일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야신'이라는 별명과 최근 4년간 3번 우승과 1번 준우승이라는 압도적인 실력을 선보였음에도 결국 구단에서 해고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역시도 순순히 해고되지 않았다. 진정성과 실력으로 극복되지 못한 현실세계의 강고한 질서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기에 김 감독은 최고의 강한 수를 포기하지 않았다. 실력으로 우승하고, 결국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항명'하고 명예롭게 해고되는 수순이 바로 그것이다. 일종의 '죽음의 미학'일지 모른다.
동아일보DB ■"너만 그렇게 순수하고 고귀해?"
또 한 가지 연상되는 이미지는 탐 크루즈가 주연했던 한 미국 영화다. 이 '제리 맥과이어'와 '아리랑'과는 아무런 연관성은 없다. 그러나 '진정성'과 '폭력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영화 '제리 맥과이어'는 스포츠 매니지먼트사에 근무하는 주인공 제리가 마치 무엇에 홀린 것 마냥 회사동료들에게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 진정성을 갖고 우리 일을 바꿔보자"는 투의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그 복잡다단한 스토리를 시작한다.
마치 '유작'처럼 만들어진 거장의 셀프카메라는 일견 국내 영화계에 던지는 '연서'이자 '협박'으로 비친다. 아마 제리 맥과이어를 해고한 그 거대재벌 사장이 제리의 편지를 읽고 느낀 당혹감은 '아리랑'을 접한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상당수의 영화기자나 평론가 혹은 영화제작자들이 느꼈을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김 감독은 주류에게 상처를 받았고 이제 주류는 그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상당수 한국 영화판 관계자들은 이렇게 독백했을지 모른다.
"너 혼자 진정성을 가졌다고? 좋다, 그러면 넌 계속 그렇게 (외롭게) 살아라"
김기덕 감독은 그런 답변에 대해 자신의 대답을 '아리랑' 속에 장치해 놓고 있다.
2003년작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 등장한 불상을 들고 멧돌을 허리에 메고 산을 오르는 영화 장면을 끼어 넣은 것이 그 첫 번째요, 마지막은 자신이 만든 수제 총을 종국에는 자신을 향해 당긴다는 점이다.
자신의 변호는 물론 순교까지 각오한 그의 '아리랑'은 어찌 보면 김기덕 자신의 세상을 향한 '출사표' 일지도 모른다. 흥행여부나 세상의 편견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말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