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에 사는 사람들]중국서 온 제주 상귀리 부녀회장 한옥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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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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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선 씨(왼쪽)가 자신이 운영하는 제주시 도두동 5일장 그릇가게에서 남편 이영휘 씨와 다정하게 밝은 미소를 짓고 있다. 한 씨는 동네 대소사에 앞장서며 ‘이주여성 부녀회장’으로 유명해졌다. 제주=임재영 기자
한옥선 씨(왼쪽)가 자신이 운영하는 제주시 도두동 5일장 그릇가게에서 남편 이영휘 씨와 다정하게 밝은 미소를 짓고 있다. 한 씨는 동네 대소사에 앞장서며 ‘이주여성 부녀회장’으로 유명해졌다. 제주=임재영 기자
“한국오면 ‘돈 비’ 맞는줄 알았죠… 이젠 일한만큼 버는 행복 찾아
13년전 남편만 믿고 한국행…3000만원 빚 통장에 한숨만
동네일 도맡고 또순이 생활…이젠 당당한 그릇가게 주인


“많이는 못 깎아드리지만 집에서 쓸모가 많을 거예요.” 지난달 27일 오후 ‘민속 5일장’이 열린 제주시 도두동의 그릇 상점. 중국동포 결혼이주여성인 한옥선 씨(51·제주시 애월읍 상귀리)가 전대를 차고 냄비, 도마, 프라이팬을 팔고 있었다. 주방용품 등 수백 종류의 물건을 진열한 상점에서 손님과 흥정하는 모습이 꽤 능숙하다.

찾는 이가 뜸해진 저녁 시간, 남편 이영휘 씨(58)와 커피를 나누며 여유를 즐겼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시장 입구에 천막을 치고 그릇을 팔고 있던 신세였다. 이날처럼 비가 쏟아질 때면 장사를 접어야 했다. 그릇가게 주인이 상점 인수를 제의해 왔을 때 하늘을 날 듯 기뻤다.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정이 찾아왔다.

1997년 입국 이후 13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 무단장(牧丹江) 시. 어느 가을 날 한국 관광객을 안내할 통역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재미 삼아 나간 것이 남편과의 운명적 만남으로 이어졌다. 둘 다 이혼의 상처를 안고 홀로 애를 키우며 살고 있는 처지가 비슷해 쉽게 가까워졌다. 청혼을 받고 고민이 많았다. 미용실을 운영하며 비교적 탄탄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한국에 대한 동경심이 너무 컸다.

“그때 한국에 가면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결혼 결정을 내리고 제주 땅을 밟았을 때 기쁨은 잠시였어요.”

팍팍한 현실이 눈앞에 다가섰다. 전처가 남긴 아들과 두 딸은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냉장고는 마당에 꺼내 물청소를 해야 할 지경이었다. 3000만 원 빚이 있는 통장을 건네주는 남편이 너무나 야속했다. 그래도 자신을 믿어주는 성실한 남편이 있었기에 하루하루를 견디고자 마음먹었다. 1년쯤 흐른 뒤 중국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한국에서 돈 벌고 싶다던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비자가 나오지 않아 급한 마음에 3일 걸려 배로 찾아갔지만 어머니는 이미 한 줌의 재로 변해 있었다. 산소 앞에서 목 놓아 피울음을 토해냈다. 그때는 재혼한 것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다시 마음을 잡고 생업에 뛰어들었다. 사춘기를 맞은 아이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억척스럽게 버텨 나갔고 마침내 아이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비포장도로로 이어진 들판에 단층짜리 집을 지었다. 2000년 늦둥이 아들을 얻은 뒤 부부 금실은 더욱 좋아졌다.

7, 8년이 지나면서 마을 일에 관심을 갖게 됐다. 동네 대소사에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이웃들과 정을 나눴다. 2007년 상귀리 부녀회장을 맡았다. 이주여성이 부녀회장에 임명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2008년엔 ‘전국 결혼이민자 정착 우수사례’ 발표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직함이 계속 늘어났다. 애월읍 의용소방대원, 애월읍 바르게살기협의회 부위원장, 제주도 거주외국인지원위원회 부위원장. 3년 전엔 중국자조여성모임도 만들었다. 이주여성들과 제주지역사회의 가교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주여성에 대한 불신이 이주여성의 정착을 가로막는 최대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이주여성들이 고충을 호소할 때마다 ‘그래도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사회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큰 행복’이라고 강조해요. 냉랭한 눈초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주여성이 노력한다면 당당하게 삶을 살 수 있어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따뜻한 이웃이 많아요.”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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