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71>

  • 입력 2009년 4월 14일 13시 50분


비약은 의심스럽다. 지금까지 보인 모든 것들을 향해 처음부터 질문하게 만든다. 이게 진정 당신인가? 이 뒤에 또 다른 비약이 숨어 있지 않은가?

질문을 던진 후 앨리스는 주먹으로 제 머리를 쳤다.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형사가 '불법인가요?' 라고 묻는다고 불법을 저지른 이가 '불법입니다!' 이렇게 답할까. 사라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앨리스가 우직하게 몰아세웠다.

"불법입니까?"

사라의 검은 두 뺨이 떨렸다.

"……소를 죽여요."

"소라고요?"

앨리스가 되물었다. 격투가, 무희 그리고 도살자! 비약이 너무 심했다.

"소를 왜? 정말 소를 죽이는 겁니까? 소 도살은 자동화 된지 오래고, 소를 함부로 죽이는 건 불법입니다! 전염병이라도 퍼지면 어떡하려고요."

"소도 소 나름이겠지요."

"나름이다!"

"입맛에 따라 특별한 소를 원하는 시민도 있답니다. 가령 6개월 미만의 송아지라든가 출산 직후 송아지만 달라는 식당도 있지요. 또 생고기로 먹기 위해 특정 부위만 따로 뽑아내야 할 때도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하죠. 도살 자동화 시스템은 법에 따라 정해진 소에만 적용할 수 있어요. 고기를 날것으로 먹기 위해 함부로 도축하는 일을 할 순 없지요."

"돈을 벌기 위해 소를 죽여 왔다는 거군요, 그것도 불법으로! 그럼 변주민 선수와는……."

"비밀 도살장에서 만났습니다. 5년 전 봄이었어요. 변 선수도 나랑 비슷한 일을 하러 왔더군요. 전기충격기로 소를 잡는 게 제일 간편하지만, 미식가도 가지가지라서, 몸에 전기를 흘려보낸 소는 먹지 않는 시민도 있지요."

"지금도 그 일을 합니까?"

"변 선수는 곧 그만뒀어요."

"곧?"

"솜씨가 형편없었거든요. 천성이 너무 착한 사람이라서……. 단 한 방에 급소를 쳐 보내야하는데, 긴장한 탓인지 자꾸 빗나갔어요. 그 바람에 소는 길길이 날뛰고 울고……."

"사라 씨는 지금까지 능숙하게 소를 죽여 왔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 짧게 끝내는 것이, 소를 위해서도 또 나를 위해서도 좋아요."

"순순히 불법 아르바이트 사실을 털어놓는 이유가 뭡니까?"

앨리스의 날카로운 물음에 사라는 발끝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그 작은 동작에도 리듬이 실렸다.

"글쎄요. 제가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으니, 남 형사님도 가슴 속에 품은 이야기 하나 쯤 꺼내시는 게 어떨까요? 피차 시간 낭비 말고 말이죠."

앨리스의 얼굴에 불쾌한 빛이 어렸다.

"변 선수가 물귀신 작전을 편 겁니까? 불법 도축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던가요?"

노련한 협상가처럼 사라가 즉답을 않고 다시 성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3층 성벽을 이룬 돌덩어리보다 2층 돌덩어리가 더 컸고, 2층 돌덩어리보다 1층 돌덩어리가 세 배 이상 두껍고 무거워보였다. 사라가 성벽을 손바닥으로 탁탁 친 후 말했다.

"잉카의 돌이 얼마나 단단한 줄 아시나요? 잉카를 점령한 스페인 사람들이 쌓은 성벽은 지진과 함께 무너졌어요. 잉카의 성벽만 끄떡없었답니다."

"엉뚱한 소리 말고 답하세요. 협박을 받고 돈을 부쳤습니까? 이미 확인을 다 하고 왔습니다. 꽤 많은 금액을 변 선수에게 보냈더군요."

사라는 앨리스의 추궁을 무시한 채 돌아서서 성벽을 향해 뒷걸음질을 쳤다. 노를 젓듯 두 손을 흔들어댔다.

"이리 와보세요. 어서."

앨리스가 마지못해 사라 곁으로 갔다.

"잘 살피세요, 저 거대한 성벽을! 보이세요?"

"뭐가 보인다는 겁니까?"

"그냥 알려드리면 재미가 없죠. 스스로 찾아보세요."

사라가 침묵했으므로, 앨리스는 갑작스런 수수께끼를 혼자 풀어야만 했다. 코를 비빌 만큼 가까이 다가가기도 하고 사라가 서 있는 자리보다 열 걸음은 더 물러서기도 했다. 발뒤꿈치를 들기도 하고 허리를 숙여 가랑이 사이로 쳐다보기도 했다. 목을 길게 빼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스듬히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아!"

감탄사가 나왔다.

타원형 돌에 빗금처럼 내려붙은 삼각형 돌이 먼저 눈에 띄었다.

부리를 닮았네!

그 돌에 이어진 횡으로 긴 돌판은 몸통이었고, 그 돌판을 절반으로 가르며 위 아래로 뻗은 돌덩이 둘은 양 날개였다.

"새군요."

"맞아요. 정확히는 물총새랍니다. 잉카인은 튼튼하면서도 아름다운 성벽을 만들고 싶었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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