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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칠 “힘센 대만타자들 변화구에 놀아났지”

입력 2009-02-28 07:53업데이트 2009-09-22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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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만전(3월6일)이 1주일도 안 남았다. 늘 그래왔듯 한국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만야구를 낮춰보는 분위기다. 도대체 우월감의 근거는 뭘까. 대만야구를 얼마나 알기에 이러는 걸까. 역대 대만 진출 한국선수 중 가장 성공한 김덕칠을 찾아내 들었다. 1999-2000년 대만야구에 뛰어 들어 대만시리즈 MVP와 올스타를 경험한 주인공이다. 그의 증언을 통해 막연했던 대만야구의 역사와 그 원형질을 더듬어봤다.]

○대만시리즈 MVP

김덕칠은 성균관대 89학번 잠수함 투수다. OB의 지명을 받았다. 프로야구 선수는 꿈이었다. 그러나 가족이 반대했다. 보다 안정된 직장을 원했다. 바람대로 실업팀 한전에 입단했다. 거기서 98년까지 던졌다. 그리고 야구를 관뒀다. 부모님이 이민 간 미국에 건너갔다. 미련이 남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테스트를 자청했다. 그러나 안됐다. 낙담하려는 순간, 대만에서 연락이 왔다. 스카우트가 한국까지 왔다. 그렇게 타이베이현 신저우의 웨이농 팀에 입단했다. 1999년 여름이었다.

소위 ‘대체용병’이었다. 막상 가보니 막막했다. 달랑 월봉(5000달러)만 계약했을 뿐. 통역조차 없었다. 슈셍밍 감독이 통역이었다. 그 감독은 실업 한국화장품에서 뛴 전력이 있어서 한국말을 띄엄띄엄 했다. 당시도 대만은 폭력단과 연계된 승부조작이 문제였다. 때문에 야간 통금이 있어서 나가지도 못했다. 음식이 안 맞아 카레만 먹었다. 부인과 아이를 떠나서 홀로 왔는데 왜 왔나 싶었다. 울기도 했다.

이 와중에 운이 따랐다. 마무리로 뛰던 용병이 불미스런 일로 돌연 방출됐다. 중간에서 마무리로 승격됐다. 당시에도 대만타자는 힘은 좋은데 정교하지 못했다. 커브, 싱커 등 바깥으로 휘는 변화구로 타자를 갖고 놀았다. 모 아니면 도 스윙이어서 주자있으면 더 편했다. 베이징올림픽 감독이었던 홍이중이 당시 포수였다. 얼마나 흐뭇했는지 구단주가 월봉을 중간에 올려주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야구를 잘 하니 대만선수들도 다가오기 시작했다. 포스트시즌엔 선발로 전환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선발승을 따낸 뒤 대만시리즈 1차전 퉁이전에 불펜으로 나왔다. 체력이 쌓이자 3차전 선발로 다시 나왔다. 8이닝 1실점, 2-1승. 웨이농은 4승무패로 우승했고, 김덕칠은 시리즈 MVP로 뽑혔다. (그러나 MVP 트로피와 우승 반지는 없다. 한국에서 도난당했다.)

○대만프로야구 올스타

그 이듬해 김덕칠은 이적했다. TML의 파라(FALA)란 팀이었다. 옮긴 이유는 CPBL의 웨이농이 해체돼서 슈셍밍 감독이 이 팀으로 옮겨갔기 때문이었다. TML은 리그가 선수를 관리하기에 월봉은 고작 500 달러 올랐다. 그해 10승을 거뒀다. 8승이 전반기에 나왔다.

FALA의 홈은 대만 남부 최대도시 가오슝. 시즌 개막전 선발투수로 낙점됐다. 천수이벤 대만총통이 연설과 시구를 했다. 이 역사적 경기에서 8이닝 1실점, 승리했다.

여름엔 올스타에 뽑혔다. 투수용병은 단 2명. 작년 아시아시리즈를 보다가 알았는데 그 용병이 와타나베 히사노부 현 세이부 감독이었다. 그러나 후반기 체력이 달렸다. FALA는 준우승에 머물렀다.

대만야구와의 만남도 우연이었지만 결별도 그랬다. 다시 한국에서 오퍼가 들어왔다. 그러나 깨졌다. 이러다가 FALA와의 재계약 시한도 넘겼다. 짐을 모조리 두고 왔는데 다시 대만에 갈 일이 없었다. 잠신중-야탑고에서 잠시 야구를 가르치다 필드를 떠났다. 한화종합화학과 연계된 아파트 창 섀시회사(동진S&C)란 회사를 형과 창업했다. 그는 영업차장이다. 인터뷰에 응한 이유 중 하나도 “차장님 진짜 야구한 거 맞아요?”란 직원들의 의심을 풀기 위해서란다. 그는 지금도 의정부 사회인 야구팀에서 뛰고 있다.

○용병으로 산다는 것

그 시절, 몸이 안 좋아 5회까지 10실점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투수코치가 “머니게임 하느냐”고 따지더란다. 한밤중 숙소에 전화가 걸려오면 구단은 번호를 바꿨다. 폭력단의 연락일까 미리 손을 쓴 것이다.

한국선수에 대한 인식은 썩 좋은 편이 못 됐다. 쓸데없는 우월감을 내비치니 탈이었다. 우리가 용병을 보는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대만은 야구의 나라다. 야구를 잘하니까 사인세례에 택시도 공짜로 태워줬다. 그러나 못할 땐 불안하다. 월봉이니까 언제 해고될지 몰랐다. 그래서 대만신문을 사보고 자기 이름이 발견되면 괜히 불안했다.

대만생활의 가장 큰 두려움은 지진이었다. 날짜도 안 잊는다. 1999년 9월21일. 대만에 대지진이 났을 때 그는 한국에 있었다. 어머니가 위독해서였다. 귀국하다가 지진 뉴스를 들었다. 어머니가 살렸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그래도 일정은 소화해야 했기에 그 난리통에 야구를 했다. 타이중에서 낮 경기였는데 야구 역사상 유례없을 무관중 경기였다.

지금도 대만의 지인에게서 연락이 온다. 대만 TV에 그가 뛴 경기를 가끔 방송해준다는 소식과 함께. 손에 쥔 대만의 추억은 사진 몇 장뿐이지만 그곳엔 아직도 그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남아있다. 복서 홍수환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한 방이 있는 것’이다.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사진=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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