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33>

  • 입력 2009년 2월 19일 12시 36분


[제목 ‘살인자의 습성’]

"진짜 악마는 자신을 위해 슬퍼할 여인 하나 없는 남자다."

셜록 홈즈가 나오는 추리 소설의 한 대목에서 왓슨이 읊은 말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슬퍼할 여인이 없는 남자는 그저 불쌍한 남자일 뿐, 진짜 악마는 아니다. 진짜 악마는 그 기괴한 악마성을 드러내기 바로 직전까지 순진하게 슬퍼할 여인을 항상 곁에 준비해 둔다.

특별시 보안청 지하실에는 지난 70년간 전 세계 연쇄살인범에 관한 기록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다. 특별시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보안청 프로파일링 수사팀은 사건 현장에서 모은 자료들을 기록일지에 입력부터 하느라 바쁘다. 유사한 과거 범죄기록을 찾고 범행수법이 일치하는 생존 연쇄살인범 명단을 얻기 위함이다. 연쇄살인범에게는 전형적인 행동 패턴이 있기 때문에 이 기록들은 큰 도움이 된다. 2049년, 이쯤 되면 하늘 아래 새로운 범죄는 더 이상 없다.

연쇄 살인 사건이 터질 때 석범이 가장 먼저 찾는 것은 따로 있다. 보안청 범죄자 사건기록 시스템보다 유용한 것. 살인자의 마음이 되어 다음 행동을 유추하는데 디딤돌이 되는 것. 살인자의 광기를 읽음으로써 '쫓는 자로서의 감각'을 곤두서게 만드는 바로 그것. 석범은 그것과 함께 하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서재에 들어가자마자 동영상 파일 하나를 플레이시켰다. 숙련된 손놀림으로 카메라 위치를 세팅하자 한 남자가 화면에 등장했다. 하얀 피부와 말끔하게 생긴 얼굴. 헐렁한 티셔츠 안으로 너끈히 짐작하게 만드는 떡 벌어진 어깨. 매력이 넘쳐흘렀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이 동영상을 발견하겠지.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위해 이 동영상을 만든 건 아니니 오해는 마. 사실 나도 지금 굉장히 겁나거든. 내가 저지른 일 때문에."

동영상 속 인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내가 앞으로 몇 명을 더 죽인다면, 그땐 이런 동영상 따윈 필요 없을지 몰라. 그때쯤 나는 이미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아주 능숙한 악마로 바뀌었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은 약간 불안해. 이 동영상이 내게 위로가 되리라 믿어."

문제의 동영상은 석범이 검사가 된 후 세 번째 맡은 살인 사건이자 첫 번째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만든 것이다. 여섯 달 힘겨운 탐문 수사 끝에 은신처를 덮쳤지만, 범인은 이미 종적을 감춘 후였다. 석범은 어두컴컴한 지하방을 뒤지다가 간이옷장에서 카메라를 발견했다.

석범은 동영상을 처음 보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여섯 번에 걸쳐 총 여덟 시간 가량 찍어댄 동영상에는 피해자들이 얼마나 끔찍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는지, 범인이 얼마나 잔인한 악마인지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역시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지가 고스란히 담겼다.

석 달 후 범인이 잡히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석범은 이 동영상을 증거로 제출하지 않았다. 자신의 서재에 숨겨두었다가 맡은 사건이 미궁에 빠졌을 때 가끔씩 보곤 했다. "살인자의 마음을 이해하면 그의 다음 행동도 예측할 수 있다"는 셜록 홈즈의 말을 두 번 세 번 되새겼다.

범인은 서울특별시의 대표적인 종합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 강사였다. 특별시 서쪽 경계지에 몰려 있는 대학들의 여대생만 골라 성폭행 후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에, 보안청은 한 동안 인근 대학의 남학생들을 조사하느라 바빴다. 자정 무렵 납치당한 여대생이 차에서 뛰어내려 즉사하고, 범인이 몰던 차가 가로수를 들이받지 않았다면, 연쇄살인 사건은 영원히 미제(未濟)로 남았으리라.

"그냥 하고 싶어서 그랬어. 나는 미리 계획하진 않아. 그냥 저지르는 거야. 하지만 필 받아서 확 일을 저지를 땐 나도 놀라. 마치 오랫동안 준비한 사람처럼 완벽하거든. 나는 그냥 한 건데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보더라고. 그 애가 보라색 머리핀을 그날 꽂지만 않았어도, 내가 그날 확 돌아버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범인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였다. 동영상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달변이지만 생각의 깊이가 없었고 자기중심적이었으며 과장이 심했고 거짓말이나 속임수에 능했다. 죄를 저지르고도 냉담했으며 후회나 죄의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서울특별시에서 내놓은 통계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는 인구 150명 당 한 명 꼴이다. 서울특별시에만 10만 명, 아시아에는 무려 2천만 명이 산다. 특별시 연쇄살인범의 87퍼센트, 폭력사범의 42퍼센트가 사이코패스다. 사이코패스의 출소 후 재범률은 무려 75퍼센트다. 치료와 교정을 시도할수록 재범률이 오히려 올라가는 '처치 곤란한 인간들'!

"나는 내가 잘 알아. 내 직업이 심리학자니까. 나 같은 사람을 가리켜 반사회적 인간이니 경계선 인격 장애니 하겠지. 무식한 녀석들은 날 사이코패스로 몰겠지만 난 달라. 난 어릴 때 얌전했거든. 원래 사이코패스들은 유년기부터 문제를 많이 일으키잖아? 교실에서 싸우고 난동부리고 마약 하고 비리비리한 애들 괴롭히고. 하지만 나는 안 그랬어. 거짓말 좀 하고 짝꿍 물건 훔치는 것 정도? 그 정돈 애교지. 선생들도 날 굉장히 예뻐했거든. 인사도 잘 했고 성적도 상위권이었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선생들만 빼면 학교생활도 그럭저럭 재미있었어."

범인은 매우 충동적이며 책임감이 적고 행동을 제어하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능력이 보통 사람보다 현저히 떨어져 보였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는 특히 과장된 손동작이 잦았다. 그리고 약지 그러니까 넷째 손가락이 검지에 비해 훨씬 길었다. 테스토스테론이라는 남성 호르몬의 분비가 매우 활발하다는 징표였다.

"셜록 홈즈가 그랬지. 나는 '내 뇌' 그 자체라고. 다른 기관은 부속품에 불과하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인간은 원래 그냥 뇌인 거다. 내 뇌는 내가 잘 알아. 전전두엽의 행동억제 능력이 약간 떨어지긴 하지만 너희들보단 나아."

범인은 이야기를 멈추고 뒤를 흘끔 살핀 후 다시 정면을 노려보았다.

"저 뒤 냉장고 보이지? 저 안에 뭐가 있는 줄 알아? 당신이 지금 생각하는 바로 그거야. 빙고! 우린 똑같은 걸 생각하고 상상하는 비슷한 인간이지. 당신과 나의 차이가 뭔지 알아?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일을 그저 정말 저질렀을 뿐이야."

역시 달변이었다. 석범은 그가 양심이나 '내면의 목소리'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범인은 "시체를 처리할 때 오히려 마음이 평온하고 완전히 몰입할 수 있어 좋다"고도 했다.

사이코패스는 태어나는 것일까 만들어진 것일까.

2020년 무렵, 서울특별시의 행동유전학자들은 사이코패스의 유전적 관계도를 그리기 위해 가족과 친지의 혈액을 채취했다. 그 안에는 교도소에 수감 중인 연쇄살인범도 30여명 포함되었다.

행동유전학 연구가 이 문제를 푸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것은 일란성 쌍둥이이면서 서로 다른 집에서 자란 후 사이코패스가 된 사례가 일곱 쌍이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유전과 환경의 영향을 분리할 좋은 사례였다.

연쇄살인범을 만드는 데 유전자의 기여는 45퍼센트, 또래집단과 학교가 미치는 영향이 30퍼센트, 가정환경과 부모 교육이 미치는 영향이 10퍼센트, 원인을 알 수 없는 부분이 나머지 15퍼센트를 차지했다. 예상보다 가정환경이 중요하지 않았지만, '과도한 충동과 행동 제어의 어려움'과 관련된 유전자를 물려준 것은 온전히 부모였다.

"고통은 없었을 거야. 내가 깨끗이 단칼에 베었거든."

동영상이 돌아가는 여덟 시간 동안 범인은 이 말을 아홉 번이나 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슬퍼할 여인이라곤 어머니밖에 없는 '진짜 악마'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익숙한 곳에서 상대를 찾고 낯선 곳에다가 묻지. 당신이 이 룰을 깰 수 있다면, 그러니까 낯선 곳에서 상대를 찾고 익숙한 곳에다가 묻을 용기가 있다면, 당신은 이 일을 몇 번이나 안전하게 더 할 수 있어."

석범이 갑자기 동영상을 멈췄다.

사라진 곳보다 발견된 곳이 더 중요하다? 꽃뇌 사체가 발견된 주위에 뭐가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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