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석동빈]미국 자동차와 컵홀더

  • 입력 2008년 12월 16일 02시 59분


며칠 전 미국 ‘빅3’ 자동차회사 중 하나가 내놓은 신형 세단을 타봤다. 빅3에 대한 미 정부의 지원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가운데 국면 전환용으로 야심 차게 발표한 모델이어서 내심 기대가 많았다.

독일산 럭셔리 세단에도 없는 기능을 비롯해 다양한 첨단 장비가 빼곡히 들어앉은 모습을 보면서 각오가 상당하다는 것을 느꼈다. 가격도 상당히 합리적이다. 그러나 호의적인 느낌도 잠시, 여전히 변하지 않은 미국 자동차 산업의 문제점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컵홀더에 넣었는데 다시 꺼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컵홀더가 너무 깊어서였는데 이는 덩치 큰 미국인들이 주로 선택하는 맥도널드 빅사이즈 콜라 컵이 들어가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미국 중심적인 사고로 차를 만들었다는 증거다.

이 모델의 실내 장식도 멋을 부리긴 했지만 한철 지난 느낌이다. 무늬목과 액정표시장치(LCD), 버튼 등의 감성은 한국인들의 눈높이를 맞추기에도 부족해 보였다. 차의 전체적인 움직임이 나아지긴 했지만 성에 차지는 않았다. 물론 캐딜락처럼 ‘개과천선(改過遷善)’한 빅3의 브랜드도 있다.

하지만 시승했던 모델의 이미지는 오랜만에 멋을 낸 촌로(村老)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나름대로 단정하게 차려입었지만 재킷은 유행이 한참 지났고 바지도 껑충해서 ‘올드 패션’ 같은….

많은 전문가는 빅3 몰락의 원인을 노조의 무리한 요구와 방만한 경영 등에서 찾고 있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부분에 불과해 보인다. 핵심은 시장경제에서 생존할 수 있는 제품경쟁력에서 뒤떨어졌다는 것이다. 미국 자동차는 미국 소비자들에게도 외면받기 시작했다.

미국은 한 해에 1600만 대 안팎의 자동차가 팔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시장이다. 미국 소비자들은 미국 자동차에 길들여져 디테일한 감성에 약했고, 이는 다시 빅3를 타성에 젖게 만들어 성능과 품질 면에서 섬세하지 못한 차를 계속 생산토록 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직선 위주의 도로와 낮은 기름값 등 지리경제학적인 요인도 미국 자동차산업을 멸종 위기의 공룡 신세로 몰고 가는 데 일조했다. 풍요로움은 오히려 영민하지 못하고 픽업트럭처럼 먹성 좋은 ‘공룡’ 자동차들을 탄생시킨 배경이 된 셈이다.

빅3는 세계 자동차시장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거대 시장인 미국의 틀에 감금돼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자동차만을 생산해 온 것은 아닐까. 그들은 한국과 일본 자동차 기업들의 거듭되는 혁신과 근로자들의 빠르고 꼼꼼한 손놀림, 독일의 장인정신 등에 밀려 경제성, 기술, 디자인, 서비스 어느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

‘자식과 마누라’ 빼고 그들의 몸속을 돌아다니는 ‘미국적 유전자’와 자동차 제조철학까지 모두 바꾸지 않는다면 빅3에 대한 지원은 미국 경제는 물론이고 세계 경제에 더 큰 상처를 남길 것 같다. 오죽했으면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최근 “미국 자동차 회사들이 결국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예견했을까.

미국은 세계화와 개방의 첨병이다. 그러나 정작 미국이라는 ‘시골’에 안주하던 빅3는 컵홀더의 깊이만큼이나 스스로 깊게 파놓은 자만의 함정에 빠져 세계화의 가장 큰 피해자로 남을지도 모른다.

석동빈 산업부 차장 mobid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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