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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6월 30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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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이치는 참 묘하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다고 했던가. 세태를 거슬러 존재의 본질에 가까이 가려 하는 속삭임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적잖이 실망하다가도 이런 것을 보면 힘을 얻게 된다.
‘젊은 영국작가들(yBa)’은 충격적인 작품들로 유명하다. 이들은 자신의 피를 뽑아 사람의 머리를 형상화하는 등 일반의 상상을 뛰어넘는 작품을 잇달아 발표했다. 대중은 그 끔찍한 작품들이 지니는 ‘위반의 자유와 일탈의 반항’에 열광했다. ‘젊은 영국작가들’은 연예인을 능가하는 ‘스타작가’가 되었고 엄청난 돈도 벌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이들의 기세가 예전 같지 않다. 표피적 자극만으로는 예술적 승화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미술철학자 전영백은 최근 저서 ‘세잔의 사과’에서 감각적 충격만 앞세우면 예술은 고사(枯死)하고 만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미술은 미술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화가 세잔은 초상화 하나를 그리기 위해 모델을 100번 이상 세웠다. 사과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를 요구했다. 모델이 참다못해 몸을 뒤틀면 “사과가 움직이느냐”며 호통을 쳤다. 세잔은 40년 분투 끝에 사과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세잔의 사과’는 표피를 넘어 본질에 다다르고자 하는 예술혼의 상징어가 되고 있다.
‘세잔의 사과’처럼 갈고 닦아야
미술의 논리는 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피상적인 충격가치만 찾으면 정치는 죽는다. 민주주의는 자유천지이다. 그렇기에 더욱 본질적 접근이 필요하다. 한번 되돌아보자. 탄핵 열풍이 거셌던 200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예상 밖의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2년 뒤 지방선거에서 그 집권당은 참혹한 패배를 당하고 만다. 당시 많은 사람이 “씨원하다”고 했다. 한나라당이 재·보궐선거에서 ‘23 대 0’이라는 퍼펙트 스코어를 이어가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작년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불과 몇 달도 못 돼 이명박 정부는 무참하게 흔들리고 있다. 한나라당은 재·보궐선거에서도 참패했다. 집권 100일 만에 ‘이명박 퇴진’ 함성이 광화문을 뒤흔들고 있다.
민심의 향배가 점차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민심의 쓰나미’가 어느 쪽을 칠지 그 방향을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런 널뛰기가 또 있을까. ‘세잔의 눈’을 빌릴 것도 없이 한국 정치의 본질은 그대로이다. 4년여 세월 동안 바뀌면 얼마나 바뀌겠는가. 그런데도 민심은 이쪽저쪽으로 춤을 춘다.
민주주의는 인류가 만든 정치체제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도 불완전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칭송한다. 직접민주주의의 신화를 믿는 사람들이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천하의 철학자요, 둘도 없는 애국자인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도 바로 그 민주주의이다. 가장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서 최악의 비극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이 주인이다. 그러나 다수가 원한다고 그것이 곧 정의는 아니다. 국민이 법의 지배를 따르고 질서를 존중해야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스키외가 민주주의 시민일수록 더 많은 덕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법-질서 지킬 때만 자유 누려
더구나 한국 민주주의는 아직 여린 싹과 같다. 정파를 가릴 것 없이 대통령은 당선과 더불어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다. 정치권의 능력은 제자리걸음인데 국민의 요구수준은 높아만 간다. 진보, 보수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불만스러워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이 내팽개치는 ‘씨원함’에 맛을 들이면 한국 민주주의는 파국을 피할 수 없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민주주의는 조심스럽게 보듬고 가꾸지 않으면 독재로 영락(零落)할 위험이 농후하다. 대통령과 시위대가 함께 앉아 ‘세잔의 사과’를 나누어 먹지 않으면 안 된다. 대통령은 민심을 받들고 국민은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라. 더는 시간이 없다.
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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