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주성]큰 정부, 작은 정부, 좋은 정부

  • 입력 2007년 10월 10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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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에서 벌어지는 이념 논쟁의 핵심은 정부의 역할이다. 적극적인 정부를 기대하는 진보의 대칭점에 시장의 역할을 중시하는 보수가 있다. 진보는 시장의 실패에 초점을 두고, 보수는 정부의 실패를 강조한다. 양 진영의 격차는 특히 재정정책에서 두드러진다. 진보는 상대적으로 누진과세와 복지지출의 필요성을 내세우고, 보수는 그 부작용을 경계한다. 이처럼 정부 역할을 둘러싼 논쟁은 이론적으로는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현실로 들어서면 오해와 왜곡이 매우 심한 주제이다.

무엇보다 가치판단과 효율성의 문제가 뒤섞여 있다.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공평한 소득분배’와 ‘효율적 자원배분’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정부 개입의 정당성이 생긴다. ‘무엇이 분배 정의냐’는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에 사전적으로 누가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 투표를 통한 시민 의사의 집합이 불가피한 영역이다. 반면 ‘효율성’ 논쟁의 배경에는 정부 능력에 대한 평가의 차이가 있다. 정부의 개입이 정부의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정부 크기는 이념뿐 아니라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설사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진보 정부라 하더라도 정책수단이 부족하면 정부 역할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념보다 정부 서비스의 질이 우선

실제로 정부 크기에 관한 시대 조류는 정부 능력에 대한 평가를 반영한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서구 국가들에서는 안정과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꾸준한 성장 덕분에 복지재원의 여유가 있었고 정부의 경제안정 능력에 대한 신뢰도 컸다. 그러나 석유파동, 높은 인플레이션, 낮은 생산성 등으로 얼룩진 1970년대를 겪으며 유권자들 사이에는 정부가 세금 값을 못하고 있다는 회의가 커져 갔고, 1980년대에 이르러선 작은 정부를 내세우는 보수주의가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등장한다. 물론 이 와중에도 스웨덴과 같이 큰 정부의 틀을 유지하는 나라가 없지 않았다. 세금을 많이 걷더라도 이에 상응하는 정부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개도국의 경우에는 대체로 정부 서비스의 편익은 낮고 조세에 따르는 경제적 비용과 정치적 저항은 높다. 자연히 집권세력의 이념과 관계없이 큰 정부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무리하게 빚을 내서 공공부문의 영역을 넓힌 남미 국가들 대부분은 경제위기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우리의 경우 20% 남짓한 조세부담률이 서구국가들에 비해 턱없이 낮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지만 여타 개도국에 비하면 매우 성공적인 세수 확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조세저항을 우려해 목적세와 같은 비전통적 세목에 많이 의존한 탓에 소득세 등 기간(基幹)세목의 과세 베이스는 좁고 세금의 경제적 비용은 높은 편이다. 또한 성장 초기에는 정부지출의 한계효용이 높았지만 최근에는 정부생산성 증가가 상당히 둔화되었다.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낮아졌다. 한마디로 대대적인 재정개혁 없이는 정부 크기를 더 늘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늘어나는 복지 수요나 통일비용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구조적 재정적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이념과는 별개의 문제로, 능력을 벗어나는 정부 확장이 초래하는 위험을 경계하는 것이다.

좋은 정부는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정부다. 이념을 앞세우기 전에 높은 질의 정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세금을 거두더라도 이에 수반되는 정치적, 경제적 비용을 가급적 줄여야 한다. 납세자는 불만이 목에까지 차 있는데 지출 늘릴 궁리만 하는 측이나, 재정적자에 대한 우려는 아랑곳없이 인기영합적인 감세안만 내놓는 측이나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다.

스스로 개혁할 능력부터 갖춰야

큰 정부로 가려면 세수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하고, 작은 정부로 가려면 지출 삭감을 전제로 해야 한다. 세금이 아깝지 않은 정부라면 커도 좋지만, 없느니만 못한 정부라면 과감하게 줄여야 한다. 결국 이념보다는 능력이 정부에 대한 신뢰, 나아가 정부의 크기를 좌우한다는 얘기다. 국민이 기댈 수 있는 좋은 정부가 되려면 정부 자신부터 거듭나야 한다. 스스로를 개혁할 능력도 없으면서 시장을 바꾸고 민생을 살리겠다고 나서는 정부를 누가 믿겠는가.

전주성 객원논설위원·이화여대 교수·경제학 jjun@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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