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7년 10월 9일 21시 34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통독 17주년에 만난 남북 정상
3일은 동서독이 통일된 지 17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 건국일이자, 독일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한 날 이루어진 남북 정상회담. 의미 있는 날들이 겹친 덕분인지 남북 정상이 남긴 합의 또한 가볍지 않다. 정상들이 공동선언 곳곳에 남긴 ‘통일’이라는 단어가 특히 그렇다. 두 정상은 통일을 ‘자주통일’ ‘통일문제’ ‘통일에 부합되게’ ‘통일 지향적’이라는 다양한 형태로 언급했다. 수사(修辭)에 머물지도 않았다. 통일의 전 단계로 합의문 4항에 ‘정전체제 종식과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그리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하자’는 합의까지 담았다.
실천 여부와 어떤 통일을 지향하느냐는 의문을 잠시 접어 둔다면, 남북 정상의 합의는 분명한 진전이다. 남북은 통일을 향해 지금까지 가지 않은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독일 통일이 남긴 교훈이 더욱 절실해졌다. 독일은 통일로 가는 길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에도 우리가 참고해야 할 귀한 본보기다.
통일이 겨레의 염원인 만큼 그 과정 또한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 독일이 성공한 요인을 정확히 파악해 통일로 가는 지도를 치밀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정상회담 이후 정부가 보여 준 모습은 영 미덥지 않다. 3자 또는 4자 정상의 종전선언을 추진하자는 합의 자체가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정부는 3자와 4자 구분에 큰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지만 정전협정 당사국인 중국에서는 “정전협정 변경에 관한 선언이 중국을 배제하고 이루어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는 불만이 쏟아졌다. 평화체제 협상 개시 선언을 위한 정상회담을 연내에 할 수 있다는 정부의 성급한 전망도 역풍을 맞고 있다. 미국은 북핵 폐기가 선결조건이라면서 “올해는 어렵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종전선언 문제를 누가 먼저 제의했는지에 대해서도 대통령과 참모의 말이 엇갈린다.
독일은 어땠는가. 헬무트 콜 총리의 외교담당 보좌관으로 활약한 호르스트 텔치크의 비망록 ‘329일’을 들여다보자. 텔치크는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부터 1990년 10월 3일 통일이 이루어진 날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통일을 위한 독일의 온갖 노력을 기록했다. 서독이 걸어간 길이 마치 눈 위에 남은 발자국처럼 선명히 기록돼 있다.
왜 4강을 자극하는가
독일은 돌다리를 두드리듯 신중하게 일을 처리했다. 4강을 자극하지도 않았고 정면으로 도전하지도 않았다. 콜은 설득과 합의를 통해 장벽을 차례차례 넘었다. 텔치크의 프랑스 쪽 파트너였던 자크 아탈리도 증언한다. 콜과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재임 중 만나지 않은 달은 하나도 없었다. 텔치크와 아탈리는 보름에 한 번씩 만났다.
한반도에도 이미 ‘2+4’ 틀이 가동되고 있다. 6자 회담 참가국인 러시아와 일본을 통일 논의에서 완전 배제하기는 쉽지 않다. 중국이 담보하지 않는 평화체제의 효용성을 누가 보장한다는 것인가. 미국의 내년 대선 결과가 한반도에 미칠 영향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콜은 “역사의 외투자락을 붙잡아야 한다”는 비스마르크의 말을 인용하며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설득해 마지막 걸림돌이던 통일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잔류를 관철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원한다면 4강 외교에도 북한 못지않은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4강을 자극할 때가 아니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