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에게

  • 입력 2006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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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외교부 초청으로 지난주 베이징에 다녀왔습니다. 북한의 핵실험 직후여서 중국 당국자들과 이 문제를 놓고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들에게서 북핵 문제 해결의 확고한 의지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엔의 대북 제재만 하더라도 그들은 “지지한다”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선까지 동참할지에 대해서는 얼버무리기 일쑤였습니다. 외교관들이 늘 그렇기는 합니다만 되풀이되는 원론적 답변과 곤혹스러워하는 그들의 표정에서 중국의 북핵 정책이 실패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별도로 만난 중국 외교부 산하 국제문제연구소의 한 중견 연구원도 나와 생각이 같았습니다. 준(準)공무원 신분이면서도 그는 놀랍게 “중국의 대북 핵정책은 실패”라고 단언했습니다. 북핵 문제가 이렇게 심각해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고, 정보도 없었으며, 따라서 적절히 대응하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3년 전 6자회담이 시작될 때 중국이 해결하려 들었다면 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마땅한 수단이 없다”면서 “중국 정부는 이제부터 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북핵 문제가 이렇게 커져 버린 데는 중국의 책임도 큽니다. 중국은 “한반도의 비핵화를 지지한다”는 방침을 견지해 오고 있습니다만 행동으로 이를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북한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한계가 있어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북핵에 대한 이중적 태도 때문입니다. 북이 핵을 포기하면 좋지만 가져도 나쁠 게 없다는 판단이 소극적인 대응으로 이어지면서 북에 잘못된 신호를 보낸 것입니다.

북이 핵을 가져도 나쁠 게 없다?

중국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핵을 가진 북’을 용인하는 것이 중국의 국익에 어떤 도움이 될지를 따져 보느라 여념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북한 선박에 대한 검색을 꺼리고 있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베이징에서 만난 귀국의 외교관들에게 “북한 선박 검색에 참여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검색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 않으냐”며 빠져나가더군요. 그들은 군사 제재라는 말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선 벌써 “중국이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할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합니다. 핵을 가진 북이 미일(美日)의 대(對)중국 견제에 방패가 돼 줄 텐데 중국이 기를 쓰고 원점으로 돌려놓으려고 하겠느냐는 것이지요. 탕자쉬안 국무위원이 후진타오 주석의 특사로 19일 평양에 간 것도 북을 질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핵 보유를 인정해 줄 테니 더는 소란 피우지 마라”고 달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런 식으로 가선 안 됩니다. 북한의 핵 보유는 결단코 막아야 합니다. 핵을 가진 북은 덩샤오핑(鄧小平) 장쩌민 등 귀국의 개혁개방 지도자들이 지난 30년 동안 그렇게도 막으려고 노력해 온 미일과의 대결시대를 앞당기게 할 뿐입니다. 북핵 때문에 동북아의 현상 유지가 깨지고 중-미-일 간에 신(新)냉전의 먹구름이 드리워진다면 가장 피해를 볼 쪽은 중국일 것입니다. 중국이 지금 그럴 여력이 있습니까.

중국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의장국을 맡은 것은 장차 이 회담이 동북아시아 다자(多者)안보 체제의 기초가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자안보 체제야말로 중국이 원하는 외교 목표가 아닙니까. 미국과 맞상대하기엔 아직 힘에 부치므로 다자의 틀 안에 묶어 두고 대결 대신 평화공존, 상호협력을 하겠다는 구상 말입니다.

1980년대 말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도 ‘아시안 프로세스(Asian Process)’라는 비슷한 다자 구상을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다자안보 체제는 동북아의 새로운 안보협력 실험으로 기대를 모아 왔습니다. 북핵 때문에 이 실험이 좌절된다면 중국으로서는 또 한 번의 기회를 놓치는 셈이 될 것입니다.

鄧의 한중 수교 결단 본받아야

북한은 머지않아 6자회담 대신 핵보유국인 미-중-러와 함께 ‘4자 동북아 핵군축회담’을 하자고 제안할 것입니다. 북의 전략 전술 순서가 그렇게 돼 있습니다.

후 주석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덩샤오핑은 1992년 8월 중국 일각의 반대와 북한의 극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중 수교를 단행했습니다. 북은 중국을 ‘변절자’로 낙인찍고 4년간이나 관계를 끊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덩샤오핑의 결단이 있었기에 중국도 동북아도 그만큼 발전했고 평화로워졌습니다. 후 주석! 역사적 결단의 순간은 자주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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