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6년 6월 9일 03시 04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부모는 자녀로부터 소외당하고, 교사는 교실에서 제자들한테 야유를 받는다. 공권력도 도전 받고 있으며, 의사나 판사의 지위도 예전만 못하다. 정치인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불신이 가득하다.
이렇게 권위가 사라지는 것은 우리가 더불어 살아감에 있어 꼭 필요한 무언가가 사라진다는 얘기다. 함께 사는 데 필요한 공통 가치를 제시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이 흔들린다는 뜻이다.
얼마 전 학교에서 제자가 교사를 폭행한 사건이나,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청년들이 경찰 차량을 불태우며 경찰과 충돌한 사건은 이 사회의 권위가 얼마나 떨어졌는지를 잘 보여 준다.
이런 일을 보며 어떤 이들은 현대 사회에서 권위, 혹은 권위주의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권위가 다른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 것 같다.
사실 윗사람의 권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개인조차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선생의 권위를 거부하는 학생도 함께 어울리는 무리 내 우두머리의 권위에는 스스로 고개를 숙인다. 환자들이 의사의 치료는 믿지 않으면서 약장수의 처방에 솔깃해하는 것도 새로운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다.
권위의 위기는 공통 가치를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다. “여전히 지구는 돈다”고 했던 갈릴레이를 비롯해 기존의 사실과 가치를 인정하지 않은 엘리트들의 도전이 그때까지의 권위를 무너뜨리곤 했다.
현대의 인물로 로자 파크스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백인에게 버스 자리를 양보하지 않음으로써 흑인 인권 운동에 불을 지폈다. 기존 권위에 대항한 결과였다.
현대에 접어들며 ‘권위는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란 인식이 강해졌다. 이에 따라 권위라는 개념과 자유라는 개념을 어떻게 조화롭게 타협시키는가가 중요해졌다.
자유를 중시하는 현대인은 과거와 달리 엘리트의 권위를 덜 인정한다. 가족 관계도 예전과 다르다. 아이들은 부모와 협상하려 한다. 과거 강력한 힘으로 가족 내 모든 결정을 독점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업의 관리 방식은 더 많이 바뀌었다. 간부는 팀원이 긍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때로는 업무에도 인간적 관계를 동원해야 한다. 간부의 처지에서 업무만 강조하던 옛날 방식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처럼 권위를 거부하는 것이 규칙의 거부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일탈 행위가 증가하는 것이다. 이는 곧 공동체 사회의 붕괴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에 꼭 필요한 새로운 권위를 찾아서 확립해야 한다. ‘강력한 보스’의 시대는 지났다. 그와는 다른 실천적 형태의 권위를 찾는 일이 필요하다.
새로운 형태의 권위를 찾아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어떤 형태의 권위냐다. 위험이 동반된 일이기도 하다. 모든 형태의 권위를 향해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에 파시즘이나 분리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권위를 재확립하기 위해선 현대 사회에 와서 달라진 큰 변화를 전제로 해야 한다. 지식과 정보가 빠르고 폭넓게 전파된다는 점이다. 정보를 독점하는 자가 우두머리로 군림하고 아랫사람은 실천만 하던 체제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새롭게 확립되는 권위는 집단적 모습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수의 동의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것, 명령 형식이 아닌 민주적 토론으로 결론을 이끌어 내는 시스템이 자리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구성원들의 소속감과 동참을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새로운 형태의 권위가 필요한 시대다.
제라르 뱅데 에뒤 프랑스 회장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