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北의 ‘도마뱀 꼬리 자르기’

  • 입력 2006년 2월 27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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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 북한 김일성 주석은 당시 평양을 극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사건(1968년 1월 21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사과했다.

“무슨 사건이더라. 청와대사건이라던가.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었다. 전적으로 우리 내부의 좌익 맹동(盲動)분자들이 한 짓이지, 나나 당의 의사가 아니다. 우리도 몰랐다. 보위부 참모장 정찰국장을 다 철직(撤職·직위해제)해 지금 다른 일 하고 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박 대통령을 죽이려 했겠는가.”

그 뒤 남북관계나 국제적으로 중요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이 같은 ‘도마뱀 꼬리 자르기’식 대응은 북의 교범(敎範)이 돼 왔다.

1995년 대북 쌀 수송선인 시아펙스호에 북한이 인공기를 강제 게양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북측의 해명은 “아래 일꾼들의 실무적인 착오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2002년 9월 북-일 정상회담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에게 납치 문제에 대해 사과한 내용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일부 모험주의자들의 행동이었다.”

위조달러 제조를 둘러싼 미국의 금융제재를 벗어나기 위해 최근 북한이 모색 중인 해법도 이 연장선에 있다. 남북의 양해 아래 중국 정부가 내놓은 타협안의 골자는 바로 위폐 제조를 ‘개별 기업의 소행’으로 돌리고, 앞으로 재발 방지를 확약하는 선에서 절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워싱턴의 기류는 강경하다. 이런 얘기가 거론될 때 미 정부 핵심 관계자들이 보이는 반응은 한마디로 “턱도 없다”는 것이라고 한다. 북 외교관들의 위조달러 밀매 혐의뿐 아니라 북한이 ‘위폐를 확인할 수 있는 최첨단 설비’와 ‘미국만이 사용하는 특수 잉크’까지 수입한 정황(情況)을 파악한 미국이 북한의 조직적인 위폐 제조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 관계자는 “미국의 반응이 워낙 강경해 중국의 중재에 기대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고 털어놓았다.

북한의 꼬리 자르기 전술은 바로 항일(抗日) 빨치산 투쟁 시절의 유산이다. 마치 조직폭력 집단에서 보스를 지키기 위해 위장 자수까지 서슴지 않는 것과 똑같은 논리다.

문제는 미국의 대응 강도가 다른 대북 현안을 다루던 때와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한 외교소식통은 “미국이 옛 소련을 붕괴시킬 때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이 국제 유가를 하락시켜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일”이라며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실 실무자로서 소련 체제 전복 계획을 입안한 것이 지금의 미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라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위폐 문제를 명분으로 한 금융제재야말로 김 위원장의 비자금을 고갈시켜 북을 압박하려는 ‘초(超)정밀 유도탄’인 셈”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재발 방지를 약속한다면 위폐 동판(銅版)을 내놓으라”고 북에 전면적인 고해성사를 요구하는 것도 이런 자신감에서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진정성’을 보이지 않는 한 이번만은 북한의 종전 전술이 쉽게 통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런데도 노무현 대통령은 신년회견에서 “북한을 압박하면 한미 간에 마찰이 생길 것”이라며 굳이 북한을 두둔했다. 그런 한국 대통령을 미국과 국제사회는 과연 어떻게 볼까. 이것이 마지막에 남는 의문이다.

이동관 논설위원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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