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이대로 둘 것인가]1부⑥원칙 없는 연금 운용

  • 입력 2006년 2월 18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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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투자를 더 늘려 국민경제 전체에 기여했으면 좋겠다.” 지난해 11월 11일 오전 7시 30분 서울 서초구 반포동 메리어트호텔 2미팅룸에서 열린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운용위원회) 3차 회의. 상습 불참 멤버였던 재정경제부 측에서 이날만큼은 위원인 차관을 대신해 김석동(金錫東) 차관보가 참석했다. 김 차관보의 주장은 일관됐다. 국민연금 운용에서 주식 외에도 벤처, 부동산, 사회간접자본(SOC), 펀드 같은 대체 투자의 비중을 늘리자는 것. 하지만 연금 전문가들의 견해는 이와 크게 다르다. 국책 연구기관의 한 연구원은 “지금처럼 전문성이 부족하고 정부 간섭을 많이 받는 운용시스템을 손질하지 않은 채 주식이나 벤처투자를 섣불리 늘리면 가입자들에게 오히려 크나큰 손실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국민연금 기금 운용은 수익률을 1%만 더 올려도 기금 고갈 시한을 3년 늦출 수 있을 만큼 중대한 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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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측 입김 세고 책임은 없어

기금 운용에 대한 공식 최고 결정기구인 운용위원회 자체가 1년에 네 번밖에 안 열리는 비(非)상근기구로 한 번 회의시간도 2시간이 채 안 된다.

위원 21명 가운데 전문가로 분류되는 인사는 국민연금관리공단이사장, 보건사회연구원장,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등 관변 기관 대표 3명이 전부다.

회의도 형식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번 회의 정족수인 과반수 11명을 가까스로 채운다. 농림부 산업자원부 노동부 차관은 최근 3년 동안 단 한 번도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도 정부는 정부 위원 6명, 관변 측 전문가 3명과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든 농협 등 지역단체 3명을 확보해 사실상 과반수의 투표권을 갖고 있다.

인제대 이정우(李正雨·사회복지학) 교수는 “일반재정은 국회의 예산심의나 결산감사 등을 받게 되어 있지만 연금은 국회 등 다른 기관의 견제가 없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기금은 정책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동원’될 수 있는 정부의 ‘쌈짓돈’이 아니라 무엇보다 연금 가입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운용해야 할 자금이라는 점을 정부 당국자들은 인식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본보가 이달 초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현행 국민연금 기금의 관리 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24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13명(54.1%)이 ‘기금운용본부의 독립과 기금운용위원회 강화’라고 대답했다.

○ 공식 마스터플랜도 없이 운용

약 80조 원의 자산을 운용하는 삼성생명은 부채(지급해야 할 돈)가 언제 돌아오는지를 따져 중장기 자산 배분 계획을 짠다. 이를 토대로 매년 말 다음 해의 전략적 자산 배분 계획을, 다시 매달 전술적 자산 배분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기금 운용 규모가 삼성생명의 2배인 국민연금기금에는 1988년 처음 운용되기 시작한 이후 공식적으로 채택된 중장기 투자 계획이 없다.

2004년 말 수립한 ‘중장기 마스터플랜’도 기금운용위원회의 의결을 받지 못해 수많은 보고서 중 하나에 그쳤다. 마치 헌법도 없이 법령을 만들어내는 꼴이다.

KDI 국제정책대학원 김우찬(金佑燦) 교수는 “기금 운용의 큰 틀을 정하는 기금운용위원회가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전문성 없는 비상근 위원들의 정치적 타협의 장(場)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 ‘연못 속의 고래’, 국민연금기금

그나마 기금 운용 실적은 양호한 편이다. 1991년 이후 기금운용수익률 평균 10.04%로 주식과는 달리 안정성을 추구하는 기금 운용 성격을 감안하면 지금까지는 나쁜 성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급속도로 비대해지는 기금 규모를 보면 낙관만 할 수는 없다.

국민연금발전위원회의 2003년 추계를 보면 기금 규모는 현재 160조 원대에서 5년 뒤인 2010년에는 2배로 불어난다. 2035년이면 지금의 10배인 1715조359억 원의 기금이 쌓일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상반기 상장기업 상위 30개 기업 중 21개 기업에서 국민연금이 5대 주주 안에 포함돼 있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이 앞으로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했을 경우 간접 국유화, ‘연금사회주의(pension fund socialism)’에 대한 우려마저 나온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적립 기금 규모가 정점을 찍고 줄어들기 시작하는 2036년 이후 발생한다. 이때부터는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진다.

국민연금이 주식을 수백억 원만 팔아도 증시가 휘청거리는 판에 1년에 수십조 원을 팔아치우는 사태가 발생하면 증시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 외국에서는 어떻게 운영하나

기금 운용이 비교적 잘되고 있다고 평가를 받는 나라들을 보면 전문가 집단이 소수 정예로 정부나 정치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운용하는 경우가 많다.

연금 규모로 2004년 세계 3위인 캘리포니아주공무원퇴직연금(CalPERs)의 관리위원회 인원은 13명.

이 위원회는 보험료율 산정부터 자산 배분 결정까지 모든 업무에 대해 독립적인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있다.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는 40명으로 구성된 전문가 집단이다. 4개의 분과위원회를 거느리고 있는데 분과위원들이 이사회의 구성원을 겸하고 있어 조직의 효율성이 높다.

국회 개선안 살펴보니

“대통령비서실장이 왜 연금 운용에 관여해야 합니까. 정권의 입맛대로 운용하겠다는 겁니까.”

정부기관의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기금 운용체계 개선안에 대해 이같이 비판했다.

국회 국민연금제도개선 특위가 앞으로 다룰 운용체계 개선안은 2004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법안심사소위가 정부안을 기초로 작성한 것이다.

실제로 운용체계 개선안은 대통령비서실장이 참여하는 국민연금정책협의회 신설 등 우려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기금 운용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높여야 할 개선안이 외부 입김에 흔들릴 여지만 늘려 놓았다는 비판이다.

이 개선안은 민간 운영위원장을 선출하고, 운영위원 중 전문가를 늘리는 방안을 담고 있다. 운영위원회를 상설화하고 기금운용위원 수를 줄이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평가는 냉담하다.

우선 국민연금정책협의회 신설, 국민연금심의위원 역할 강화 등이 문제점으로 꼽힌다.

국민연금정책협의회는 기금 운용위원회보다 윗선에서 정책방향을 협의하는 기구로 국무총리가 의장을 맡도록 돼 있다.

위원으로는 재정경제부 장관, 보건복지부 장관, 기획예산처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국무조정실장,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장, 총리 지명 2명 등이 참여한다.

한 연금 전문가는 정책협의회에 대해 “입장이 서로 다른 정부 최고위 관계자들에게 기금운용위원장이 포위돼 있는 꼴”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협의회 위원 구성을 보면 정치가 연금 운용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꼬집었다.

개선안에 따르면 국민연금심의위원회의 권한에 중장기 기금운용계획과 연도별 기금운용계획에 대한 사전 심의권 등이 추가된다.

이 위원회도 복지부 차관 등 정부 인사가 장악하고 있다. 정부 주도의 모임(정책협의회, 심의위원회)이 ‘옥상옥(屋上屋)’의 모양새를 띨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개정안은 신설할 사무국에 공무원을 파견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 이는 복지부의 인사 적체 해소에 이용될 수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특별취재팀>

▽사회부

반병희 차장 bbhe424@donga.com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이은우 기자 libra@donga.com

▽경제부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교육생활부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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