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영언]“기초의원이 정당 심부름꾼이냐”

  • 입력 2006년 2월 9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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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씨는 5·31지방선거에서 재선(再選)을 노리는 강원 C시의 의원이다. 사흘 전 그는 “어느 정당에도 공천을 요구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기초의원 후보 정당공천제는 기초의회가 중앙정치에 예속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고, 이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본질을 흔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당이 기초의회까지 지배하면 조그만 일에도 편이 갈려 싸울 게 뻔합니다. 반목과 대립을 일삼는 중앙정치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오게 되는 거죠. 총선이나 대선 때면 당연히 선거운동에 동원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주민 자치나 지역 현안은 실종될 수밖에 없지요.”

L 의원은 겉으로는 정당공천제를 욕하면서 뒤로는 공천을 받기 위해 줄서기 경쟁을 하는 지역정치의 현실에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기초의원 후보 정당공천제는 이번 지방선거에 처음 적용되는 제도다. 2002년 지방선거까지는 광역단체장, 광역의원, 기초단체장 후보만 정당공천이 허용됐으나 여야는 지난해 6월 책임정치 구현과 기초의회 수준 향상이라는 명분 아래 공천 범위를 기초의원 후보까지 확대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벌써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당내 경선에 대비해 당원을 급조(急造)하고, 공천 희망자들은 ‘보따리’를 싸 들고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당원협의회장(옛 지구당위원장) 등에게 줄서기를 하고 있다.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당원협의회장은 기간 당원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데다 중앙당에 입김도 강해 경선이든 전략공천이든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기초의원, 광역의원, 기초단체장 후보 모두 마찬가지다. 얼마 전에는 한 지역구 국회의원 동생이 형을 대신해 지방선거 출마희망자 120명과 ‘사적(私的) 공간’에서 면담을 해 구설(口舌)에 올랐다. ‘공천=당선’으로 통하는 여야의 강세 지역에서는 ‘정찰가(價)’라는 말까지 나온다고 한다. 지방의원 유급제로 4000만∼7000만 원의 연봉을 받게 돼 돈을 써도 당선만 되면 밑질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전남의 한 기초의원 출마 희망자는 “50배의 과태료 등 선거법이 엄격해지면서 출마 희망자와 유권자 간에 돈이 오가는 일은 크게 줄었다. 하지만 정당공천이 확대되면서 지역구 국회의원과 공천 희망자 간에 은밀한 거래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경남의 한 출마 희망자도 “참신한 지역 일꾼 대신 재력이나 지역구 국회의원에 대한 충성심, 연줄에 의해 공천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탄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뽑는 자리는 광역단체장 16명, 기초단체장 234명, 광역의원 636명, 기초의원 2922명 등 모두 3808명. 이를 위해 현재 전국적으로 2만4000여 명이 뛰고 있다. 이들이 모두 돈으로 공천을 사지는 않겠지만 일부라도 그렇게 하고, 또 당선된다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거액의 연봉을 받으니 결국 주민이 내는 지방세가 공천 헌금이 되는 셈이다. 공천에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지역 이권(利權)사업에 개입할 소지도 있다.

“기초의원을 정당이나 지역구 국회의원의 심부름꾼으로 전락시키는 정당공천제는 철회돼야 합니다. 그래야 지방자치가 바로 섭니다. 중앙정치권은 중앙의 일이나 잘하면 됩니다. 지방자치는 지방으로 돌려주고….”

전국의 선거 현장에서 나오는 출마 희망자들의 항변(抗辯)이다. 그러나 중앙정치권은 뒷짐만 지고 있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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