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3년 동양 최대 소양강댐 완공

  • 입력 2005년 10월 15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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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고질적인 홍수를 해결하고 부족한 물과 전기를 확보하기 위해 추진된 소양강댐이 1973년 10월 15일 완공됐다. 6년 반(1967년 4월∼1973년 10월)의 공사과정에서 37명이 숨졌다. 하지만 세계 4위 규모, 동양 최대인 댐을 만들며 축적된 기술은 한국의 해외 건설 진출의 밑거름이 됐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인의 의지와 열정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공사를 맡은 이는 다름 아닌 당시 현대건설의 정주영 사장이었다. 댐은 본래 일본 공영이 설계에서 기술 용역까지 담당하면서 콘크리트로 세우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철근 시멘트 같은 기초 자재가 부족했고 설사 있다 해도 산간벽지까지 운반하는 데 엄청난 비용을 들여야 했다. 일본 공영 안대로 하자면 막대한 돈이 일본으로 흘러가게 될 판이었다.

정 사장은 현장을 수차례 답사하면서 주변에 널려 있는 모래와 자갈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사력댐을 제안했으나 정부 발주공사에 건설업자가, 그것도 댐 건설로 세계가 알아주는 일본 공영 설계안을 뒤집은 것이어서 일거에 무시당했다.

도쿄(東京)대 출신 일본 공영 하시모토 부사장은 정 사장에게 “소학교밖에 안 나온 사람이 도쿄대 출신들이 모인 세계적 댐 건설 회사를 무시한다고”고 면박을 주었고 서울대 공대 출신 건설부 관료들도 정 사장을 나무랐다. 그러나 의외의 원군이 생겼다.

“사력댐을 만들면 비용은 줄어도 댐 만드는 도중에 큰비가 와 무너지면 서울이 잠긴다”는 건설부 장관의 보고를 들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댐이 반쯤 찼을 때 무너져 서울이 물바다가 될 것 같으면 콘크리트 댐이 완공돼 물이 찼을 때 이북에서 폭격이라도 하면 그때는 끝나는 거 아닌가”라고 말한 것이다. 포병 장교 출신으로 항상 전시 체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박 대통령은 폭격을 맞아도 한 번 들썩하고 조금 파일 뿐 파괴될 걱정이 없는 사력댐을 수용한 것이다.

결국 박 대통령의 지시대로 소양강댐은 국내 기술진에 의해 사력댐으로 완공되기에 이른다. 대통령의 결정이 난 지 두어 달 뒤 일본 공영 구보타 회장과 사장이 정 사장을 찾아왔다. 팔순이 넘은 구보타 회장은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 시절 압록강 수풍댐을 만든 댐의 권위자였다. 그는 젊은 정 사장에게 90도로 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현장의 모든 조건을 다 조사했는데 암반이 취약해 콘크리트 댐보다 오히려 사력댐이 낫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당신의 식견에 존경을 표합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 가면서 나가면 된다는 정 사장의 의지는 동양 최대 소양강댐 건설에서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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