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75년 운요호사건 발생

  • 입력 2005년 9월 20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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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明治)유신으로 근대화된 일본에서 불기 시작한 정한론(征韓論)은 1873년 내치 우선을 주장하는 점진주의자들이 힘을 얻게 되면서 잠시 소강상태가 된다. 그즈음, 조선에서 쇄국정책을 펴 오던 대원군이 갑자기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과 민 씨 외족의 집정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부산 왜관 주재관이 전해 왔다.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으로서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1874년 6월, 일본 정부는 발 빠르게 관료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를 부산에 파견해 조선 정정(政情) 탐지를 지시한다. 모리야마는 이듬해 4월 연안 측량을 빙자해 군함을 조선 근해에 출동시킨 후 위협을 가하는 ‘포함(砲艦)외교’를 건의한다. 일본이 20년 전 미국의 페리 제독에게 당한 방법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하자는 것이었다.

마침내 한 달 뒤인 5월 운요(雲揚)호와 다이니테이보(第二丁卯)호가 부산에 파견됐고 이 두 척의 군함은 남해안, 동해안으로 북상해 영흥만까지 순항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4개월 뒤인 9월 20일 운요호는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蘭芝島)에 정박했다. 이노우에를 비롯한 수십 명의 해병은 담수(淡水)를 보급 받는다며 보트에 나눠 타고 해로를 탐측하면서 강화도 초지진(草芝鎭) 포대까지 접근했다.

역사적으로 조선의 국방 안보상 가장 중요한 해상관문인 강화도는 병인양요(1866년·프랑스의 내침) 신미양요(1871년·미 함대의 침입) 후 낯선 배(이양선)의 출현을 늘 경계해 왔다.

일본 배의 출현으로 놀란 초병들이 포격을 가하자 보트는 즉시 본선(운요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뒤이어 본선으로부터 맹렬한 함포 사격이 시작됐다. 일본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오후에는 영종도에 포격을 가하며 상륙해 살육, 방화, 약탈을 자행했다.

이 사건으로 조선군 35명이 죽고 16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 등을 약탈당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피해는 단 두 명의 전사자에 불과했다. 그 유명한 ‘운요호 사건’이다.

사건 후 일본은 군함을 잇달아 파견해 무력시위를 벌이며 조선 정부의 사죄와 조선 영해의 자유 항해, 강화도 부근 개항 등을 요구했다. 마침내 일본 정부는 6척의 군함과 운송선, 400여 명의 병력과 함께 전권(全權) 대표단을 파견해 1876년 2월 27일 강화도조약(한일수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이는 국제법적 토대에서 양국 간에 이뤄진 최초의 외교 행위이자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허문명 기자 ange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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