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대통령이 아름다울 때

  • 입력 2005년 9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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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極東)의 작은 나라에 사는 기자가 미국 대통령의 생각을 가늠할 수 있을까? 북한 핵 문제가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한미 관계가 논란을 빚을 때마다 그런 자문(自問)을 해 보지만 대부분의 경우 필자가 내리는 자답(自答)은 ‘어렵겠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12일 군용 트럭을 타고 뉴올리언스의 카트리나 피해 현장을 둘러보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그의 심정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듯했다.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유린하던 지난 2주 동안 부시 대통령은 끝없는 비난에 시달렸다. 그럴 만도 했다. 현장이라고는 기껏 뉴올리언스 공항을 찾았을 뿐이니….

지금 부시 대통령과 그의 행정부를 향한 ‘블레임 게임(blame game·비난 게임)’은 카트리나 못지않다. 부시 대통령이 11일 밤 뉴올리언스에 급파된 전함 이오지마 호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현장 시찰에 나선 이면에는 그런 ‘블레임 게임’에 맞서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일까?

부시 대통령이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함 이오지마의 이름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2월의 저 유명한 이오지마(硫黃島) 전투를 기념해 붙여진 것이다. 미군 사상자만 2만4800여 명에 달했던 최대 격전지, 미 해병대원 6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섬 정상에 성조기를 꽂는 사진으로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돼 있는 바로 그 이오지마. 당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일본 본토 진격의 교두보를 마련했던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 제독―그는 이순신 장군 이후 일본 해군에 가장 큰 패전을 안겨준 미드웨이 해전의 영웅이었다―은 ‘평범한 장병들의 비범한 용기(uncommon valor)’를 높이 기렸고, 그 ‘비범한 용기’는 지금도 이오지마 호의 정신으로 살아 있다.

바로 그런 전함에서 칼잠을 자고 참상의 현장에 뛰어든 대통령을 단지 ‘블레임 게임’의 대상으로만 내칠 수 있을까?

나는 대통령이 아름다운 순간은 이런 때라고 생각한다. 그건 미국 대통령이나 한국 대통령이나 다를 바 없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직도 ‘블레임 게임’의 단골손님이다. 하지만 그들도 재임 중 태풍이나 폭우, 혹은 가뭄이 닥쳤을 때는 한밤중을 가리지 않고 인터폰으로 민정비서관을 찾았다. “아직도 바람이 잦아들지 않았는가.” “아직도 비소식이 없느냐.”

박정희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국민과 생사고락을 같이한다는 확신을 줄 때 대통령은 아름답다.

지난해 이라크 아르빌에서 노무현 대통령도 그랬다. “대통령님 한번 안겨 보고 싶습니다”며 달려드는 자이툰부대원을 껴안으며 노 대통령은 눈물을 훔쳤다. 그때 노 대통령은 ‘우리 대통령’이었고, 듬직한 최고사령관이었다.

며칠 뒤면 추석이다. 남미 순방과 유엔 총회 참석을 마친 노 대통령은 추석 하루 전인 17일 귀국한다. 고단할 것이다. 대통령 일정상 불가능한 주문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아르빌에 들러 우리 장병들과 추석을 함께 보내고 왔으면 좋겠다. ‘대통령과 국민의 소통’을 거기서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김창혁 국제부 차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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