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영언]무두일(無頭日)

  • 입력 2005년 9월 10일 03시 00분


코멘트
직장인이 가장 즐거워하는 날은?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하면 ‘무두일(無頭日)’이란 답변이 쏟아져 나올지 모른다. ‘무두일’이란 상사(上司)가 출장이나 휴가로 자리를 비운 날을 뜻하는 조어(造語)다. 경영혁신 컨설턴트 구본형 씨가 쓴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직장인에게 무두일은 행복하다. 상관이 없는 날은 자유롭고 숨을 쉬기가 편하다. 일을 해도 즐겁다.” 사소한 일에까지 꼬치꼬치 신경을 쓰는 깐깐한 상사의 부하일수록 그런 생각이 강할 것이다.

▷한때 청와대에서도 ‘무두일’이 화제였다. YS 정권 때의 일화(逸話) 하나. 한 기자가 L 수석비서관에게 말했다. “내일 대통령이 해외 출장을 떠나면 완전한 자유의 몸이네요. 그동안 푹 쉬세요.” 수석비서관이 맞받았다. “무슨 소리예요. ‘무두일’인데 더 꼼꼼하게 청와대를 챙겨야지. 언제 대통령에게서 전화가 올지 모르는데.” 당시 청와대의 대부분 비서관에게 ‘무두일’은 ‘해방의 날’이 아니라 더욱 부담스러운 날이었다.

▷‘무두일’에 사고가 난 경우도 있다. 참여정부 첫해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다. 노 대통령이 청와대 상황실에 전화를 걸었으나 당직 근무자가 잠을 자는 바람에 연결되지 못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나라 밖에선 곧 한미 정상회담이 열리고, 나라 안에서는 화물연대 파업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24시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작동해야 하는 대통령과 비서실 간의 지시·보고 시스템이 멈춰 버린 것이다. 노 대통령의 이번 중남미 순방 기간에는 청와대의 ‘뒷문’이 열리지 않도록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노 대통령은 엊그제 출국 비행기 안에서 “대통령이 나가니 나라가 열흘은 조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정론(聯政論) 등 대통령의 숱한 정치적 발언에 지칠 대로 지친 국민에게는 ‘참을 수 없는 대통령 말씀의 가벼움’이 오히려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바라건대 대통령 귀국 후에도 ‘나라의 조용함’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날이면 날마다 ‘무두일’ 같으면 좋으련만.

송 영 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