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최영묵]국제기구의 한국인들

  • 입력 2005년 7월 27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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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개봉한 최신작 중 ‘사하라’라는 영화가 있었다.

로맨스와 어드벤처를 적당히 섞어 놓은 그저 그런 영화였지만, 매력적인 여주인공 페넬로페 크루스의 연기는 기억에 남는다. 세계보건기구(WHO) 요원으로 분한 그녀가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일그러진 시신들을 뒤지며 활동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한국에도 비슷한 인물이 있다. 이종욱 WHO 사무총장은 1983년부터 WHO 남태평양 나병퇴치팀장으로 오지에서 원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을 돌봤다.

서울대 재학 시절에는 경기 안양시의 나환자촌인 나자로마을에서 봉사활동을 했고, 미국 하와이주립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직후에는 사모아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했다.

그는 WHO 결핵국장 등을 거쳐 2003년 1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유엔 전문기구의 선출직 수장의 자리에 오른다. WHO 사무총장은 평범한 국제기구의 수장이 아니다. 국제사회에서 유엔 사무총장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는다.

이런 자리에 한국인이 올랐다는 사실 자체도 대단하지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기울인 정성이 더 큰 감동을 준다.

선출 당시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를 다녀온 후배 기자의 취재기에 따르면 그는 무엇보다 겸손했다.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했지만 이를 자랑하지 않았다. “나를 슈바이처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곤 했다. 그의 경력을 보면 부잣집 아들로 오해하기 쉬우나 대학 시절 가세가 기울어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그는 또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1997년에 출마 기회가 있었으나 노르웨이 총리 출신인 할렘 브룬틀란이 버거운 상대라는 판단이 들자 일단 출사표를 접고 내부 지지자 확보에 더욱 신경을 썼다. 그리고 마침내 2002년 8월 브룬틀란 사무총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차기 선거를 포기하자 그때서야 출마를 공식화하고 단숨에 당선됐다.

WHO 생활 한 달 만에 당시 사무총장이 ‘하느님’같이 보여 사무총장이 되겠다는 꿈을 가슴에 품은 지 꼭 20년 만이었다.

지리산 산골에서 태어나 지난달 22일 유엔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 재판관에 재선된 박춘호 재판관의 인간 승리도 감동적이다. 문교부 편수관으로 있으면서 중국음식집 종업원을 자청해서 중국어를 배웠을 정도로 학구열이 강했다.

그도 이 같은 노력과 겸손, 여유, 포용력으로 유수 국제기구의 영예로운 자리를 연임할 수 있었다. 그는 3면이 바다이면서도 ‘해양국가’라고 말하기 쑥스러운 조국의 체면을 세워 주고 있다.

유엔 공동서열 3위라는 유엔 사무차장 겸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ESCAP) 김학수 사무총장도 67세의 나이를 잊고 아시아교통망통합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런 위상이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다. 유엔 소속 남태평양 경제개발 고문, 유엔 개발협력국 경제계획관, 국제지구콜롬보플랜 사무총장 등 국제무대에서의 경력을 차곡차곡 쌓아 왔다. 그래서 그는 ‘고국을 떠나 더 위대해진 사람’이라고 불린다.

뜬금없이 이들을 거론한 것은 유엔 사무총장의 꿈을 키우다 낙마한 홍석현 주미 대사를 지켜보면서 느낀 단상 때문이다.

최영묵 사회부장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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