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719년 로빈슨 크루소 출간

  • 입력 2005년 4월 24일 18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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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제외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출판되고 번역된 책 ‘로빈슨 크루소’. 그러나 영국 작가 대니얼 디포는 환갑이 다 되어 처음 쓴 이 소설을 출간하겠다는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다. 1719년 4월 25일 출판된 책의 초판엔 작가 이름조차 씌어지지 않았다.

책의 대성공 이후 패러디가 쏟아져 나오면서 크루소는 여자, 어린이, 성도착자, 심지어 개로 변신하기도 했고, 크루소를 무인도가 아닌 화성에 보낸 재해석판까지 있다. 그림책이 양산되면서 ‘로빈슨 크루소’는 엉뚱하게 어린이 책처럼 자리 잡았다. 하지만 크루소는 본질적으로 청교도와 자본주의라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구현한 계몽주의 시대의 스타였다.

난파한 선원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근면하게 생활을 설계하고 식인종의 포로 프라이데이를 구출해 하인으로 삼고 살다 28년 만에 귀향한다. 크루소는 방랑자로 출발했으나 이성의 힘으로 역경을 극복한 개척자다. 여기엔 디포 자신의 꿈이 반영되어 있을는지도 모른다. 디포는 파산한 상인, 실패한 정치선동가, 고독한 첩자를 전전하며 평생 비주류로 살았지만 그를 지탱해준 것은 청교도 특유의 엄격한 노동 윤리와 이성에 대한 신봉이었다.

불굴의 의지와 함께 이 책에 담긴 낯선 곳에 대한 동경, 개인 유토피아에 대한 꿈은 전 세계를 매혹했다. 그러나 눈 밝은 이들은 이 책에서 세계에 식민지를 만들고 원주민에게 자신의 가치를 강요하던 유럽인들의 오만함을 보았다.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는 “로빈슨 크루소는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전형”이라고 갈파했다.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믿음, 기독교 신앙이 투철한 크루소는 ‘미개’한 프라이데이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종교를 갖게 한다. 자연을 소유물로 여기며 ‘영주’를 자처한다.

하지만 이 덕분에 후세대는 로빈슨 크루소에 대한 걸출한 ‘재해석’을 갖게 됐다.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는 로빈슨 크루소를 변형한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서구 문화를 절대시하는 우월적 태도, 자연을 인위적으로 재편하려는 조급증을 지적한다. 또 2003년 노벨 문학상을 탄 작가 존 쿠체는 여성의 시각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재해석한 소설 ‘포’를 내놓았다. 재해석과 패러디조차 걸출하니, 역시 고전은 위대하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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