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02>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3월 10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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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한왕 유방은 대장군 한신에게 사로잡힌 위왕 표가 역마에 실려 형양(滎陽)으로 끌려오자 감회가 착잡했다. 그해 봄 3월 머뭇거리며 임진(臨晉)나루를 건넌 한왕에게 스스로 나라를 들어 항복해와 크게 기세를 돋워준 것은 바로 그 위왕 표였다. 하지만 팽성의 패전에서 막 빠져나와 재기의 불씨를 어렵게 되살리고 있는 한군에게 찬물을 끼얹은 것도 또한 그였다.

“그래, 위왕은 과인을 버리고 패왕을 찾아가 보니 어떻던가?”

한왕은 묶인 체 무릎 꿇은 위표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빈정거리듯 물었다. 아무래도 스스로 찾아와 항복할 때의 기특함보다는 어려운 처지에 빠진 자신을 속이고 패왕에게로 달아난 서운함이 앞선 까닭이었다. 위표가 체념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싸움에 져서 사로잡혀 온 장수에게 달리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어서 이 목을 베시어 왕법이 준엄함을 널리 세상에 알리십시오.”

그래놓고 무겁게 고개를 숙이다가 다시 처연한 눈길로 한왕을 올려보며 보태었다.

“다만 늙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은 죄가 없으니 대왕께서 너그럽게 살펴 주십시오. 내 들으니 천하를 도모하는 자는 남의 부모와 자식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비록 한왕에게 너그러움을 빌고 있었지만 그 말이나 몸짓이 조금도 비굴해 보이지가 않았다. 그게 어둔 밤에 갑작스레 불이 켜지듯 한왕의 머릿속에서 지워져있던 위표의 옛 모습을 반짝 되살려냈다. 화려하게 의장(儀仗)을 갖춘 3만 장졸을 이끌고 스스로 항복해와 자신을 감격케 하던 때의 모습이었다. 그게 위왕 표에게 느끼고 있던 한왕의 서운함과 노여움을 슬며시 씻어냈다.

“천하를 아우른 진나라는 대역을 저지른 죄인의 삼족을 모두 죽였다(夷三族). 그런데 너는 어찌 대역의 죄를 저지르고도 감히 부모와 처자가 성하기를 바라느냐?”

입으로는 여전히 그렇게 엄히 꾸짖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죽일 뜻이 없었다. 한왕이 그래놓고 잠시 위표를 살피다가 알아들을 만큼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허나 씻을 수 없는 죄란 없는 법이다. 과인이 하늘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본 따 너를 살려준다면 너도 지성으로 과인을 섬겨 지난 죄를 씻어보겠느냐?”

그 말을 들은 위표가 무엇 때문인가 부르르 몸을 떨더니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그런 위표의 두 눈에서는 무슨 세찬 불길이 이는 듯했다. 목숨을 이을 가망이 생기자 갑자기 치열해진 삶에의 애착이 두 눈을 통해 내뿜는 불길이었다.

“대왕께서 기회를 주신다면 신은 간과 뇌를 땅에 쏟고(肝腦塗地)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난 죄를 씻어 살려주신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렇게 외치는 위표의 목소리에는 그때까지 없던 비굴함까지 느껴졌다. 그래도 한왕은 낯빛까지 환해져서 위표를 받아들였다.

“좋다. 내 다시 한번 너를 믿어보겠다. 내 너를 포의(布衣)로 종군케 할 것이니 두 번 다시 과인을 저버려 하늘에 죄짓지 않도록 하라.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느니라(獲罪於天 無所禱也)”

그리고는 좌우를 돌아보고 소리쳤다.

“위표를 포의로 군중(軍中)에 두고 막빈(幕賓)과 같이 대접하여라.”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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