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7년 통합야당 신민당 출범

  • 입력 2005년 2월 6일 17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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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自衛)정당.’

1967년 2월 7일 출범한 통합야당 신민당은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했다. 민중당과 신한당이 뭉쳐 탄생시킨 신민당의 통합선언문에는 그 이유가 잘 나와 있다.

‘신민당은 이 나라의 반민주적인 군정 횡포를 종식시키고, 무자비한 수탈행위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할 자위정당이다.’

통합결의문은 “다음 선거(대선)에서 기필코 정권교체를 성취시켜 민주정치를 재건하고, 민생을 도탄에서 구출한다”고 밝혀 ‘자위의 길=정권교체’임을 분명히 했다.

석 달 뒤인 같은 해 5월 3일 열린 제6대 대선. 신민당 윤보선(尹潽善) 후보는 민주공화당 소속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도전장을 냈지만 116만2125표 차로 대패했다.

5대 대선에서도 윤 후보는 박 대통령에게 졌지만 그때 표 차는 15만6026표에 불과했다. 야당이 4년 사이 100만 표나 더 뒤지게 된 원인은 ‘경제’였다고 정치학자들은 분석한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6년)의 순항, 한일협정 타결과 베트남전 파병에 따른 일본과 미국 자본의 유입 등 경제상황이 박 대통령에게 매우 유리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金炯旭) 씨는 훗날 회고록에서 “그런 여건에서는 비록 이름 없는 필부(匹夫)를 내세워 놓았더라도 당선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

대선 한 달 뒤인 6월 8일 제7대 총선이 실시됐다. 신민당은 ‘견제세력 구축’을, 여당인 공화당은 ‘안정세력 확보’를 외쳤다. 특히 공화당은 ‘박 대통령=경상도 대통령’이란 비판 여론을 의식해 취약 지역인 충청과 호남을 집중 공략했다.

총선에서는 경제적 호재에 관권과 부정이 더해졌다. 공화당이 총 175석 중 129석(73.7%)을 휩쓸었다. 신민당은 서울 14석 중 13석, 부산 7석 중 5석을 차지하며 대도시에서는 선전했지만 개헌 저지선(59석)에 14석이나 모자란 총 45석을 얻는 데 그쳤다.

통합야당인 신민당이 대선과 총선에서 잇따라 ‘자위’에 실패한 것은 한국 정치사의 거대한 물줄기까지 바꿔놓고 말았다. 공화당이 두 선거의 승리를 기반으로 1969년 3선 개헌을 단행하면서 한국의 정치는 기나긴 암흑기로 빠져들었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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