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59>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1월 16일 1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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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팽성을 사이에 둔 공방은 서초패왕 항우와 한왕 유방에게 여러 가지로 충격과 변화를 주었다. 그 변화 가운데서도 뒷날 천하 형세를 결정짓는 데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두 사람의 자기인식에 가져다준 변화였다.

팽성이 실함될 무렵의 패왕은 제(齊)나라라는 뜻밖의 수렁에서 그동안 키워온 자신의 군사적 재능에 대한 자부심을 거의 탕진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정병 3만으로 1000리를 내달아 56만의 한군(漢軍)과 그 동조세력을 질그릇 부수듯 하고, 그중에 20여 만을 사수(泗水)와 수수(휴水) 가에서 몰살시키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그때부터 패왕은 이전의 군사적 재능에 대한 자부심을 넘어 무적불패(無敵不敗)의 환상까지 품게 되었다.

하지만 먼저 웃고 나중에 울게 된 꼴이 난 한왕 유방은 달랐다. 수십만의 장졸을 잃고 비참하게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그동안의 자신을 돌아보니 모든 것이 후회스럽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대군의 터무니없는 전개와 방만한 통제 같은 군사적 오류로부터 함양에 들 때보다 더 민심의 향배에 소홀했던 정치적 방심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돌이켜보아도 용서하기 어려운 무능과 실책들이었다. 따라서 그런 것들로 새로워진 한왕의 자기인식은, 거만하고 변덕스러운 것으로 널리 알려진 한왕의 개성에 무엇보다도 신중함과 겸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했다.

무사히 하읍(下邑)에 있는 여택(呂澤)의 진채에 이른 한왕이 말에서 내리기 바쁘게 장량에게 묻기부터 먼저 한 것도 새로 그런 신중함과 겸손에서 비롯된 일로 보인다.

“이번 팽성 일로 과인은 참으로 많은 걸 배웠소. 무엇보다 뼈저리게 느낀 것은 천하대사(天下大事)를 혼자 힘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점이었소. 이제 과인은 함곡관 동쪽의 땅을 떼어주고 과인을 도울 인재를 사려 하오. 자방 선생이 보기에 누가 나를 도와 일통천하(一統天下)의 큰 공을 이룰 수 있겠소?”

도중 내내 그 일만 생각해와 더 미룰 수 없다는 듯, 말에서 내린 한왕은 안장에 기댄 채 장량에게 그렇게 물었다. 장량도 미리 생각해둔 것이 있었던지 오래 끌지 않고 대답했다.

“먼저 대왕께 권해드릴 사람은 구강왕(九江王) 경포(경布)입니다. 경포는 항왕(項王)의 뛰어난 장수로서 지금껏 그 손발이 되어 일했으나, 지금은 그들 사이가 전만 같지 않습니다. 지난 봄 항왕이 제나라로 치러 갈 때 군사를 내어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팽성이 우리에게 떨어질 때도 멀지 않은 육(六) 땅에 있으면서 그냥 보고만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미 항왕에게서 멀어진 만큼, 굳이 대왕을 돕지 못할 까닭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시급히 달래 쓰셔야 할 사람입니다.

다음은 팽월(彭越)입니다. 팽월은 제왕(齊王) 전영에게서 장수인(將帥印)을 받고 양(梁)땅에서 군사를 일으켜 항왕에게 맞선 적이 있습니다. 항왕이 보낸 장수 소공(蘇公) 각(角)을 크게 무찌르고 적지 않은 초병(楚兵)을 죽였으니, 전영마저 항왕에게 죽은 지금 대왕에게가 아니면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다행히 지난번 외황(外黃)에서 이미 대왕 아래로 들었고, 대왕께서는 위(魏)나라 상국(相國)으로 세우셨으나, 그리 가볍게 대할 사람이 아닙니다. 보다 높게 쓰시어 진심으로 대왕을 돕게 해야 합니다.”

장량이 그렇게 말해놓고 다시 한사람 뜻밖의 이름을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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