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안돈다]“주식도… 부동산도… 투자 겁나요”

  • 입력 2004년 6월 9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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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가 너무 떨어져서 원금이 축나는데…. 어디 돈 좀 굴릴 데 없어요?”

20억원을 은행의 1년 만기 정기예금에 넣어 놓고 이자를 받아 생활하는 김모씨(58)는 최근 주거래은행의 프라이빗뱅킹(PB) 담당자를 찾았다.

“주식시장은 너무 출렁거리고 채권 값은 이미 많이 올랐어요. 이제는 부동산도 위험합니다.” PB담당자의 해법은 돈을 그냥 은행에 놔두라는 것.

결국 김씨는 은행에 ‘보관료’ 내는 셈 치고 금리 3%대인 1년 만기 정기예금에 돈을 묻어두기로 했다.

김씨처럼 투자를 포기하고 자금을 묵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돈의 흐름’이 계속 둔화되고 있다. 대기업의 투자도 감소해 대기업 대출은 4개월 연속 감소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가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개인과 기업이 적극적으로 ‘돈을 돌릴 수 있는’ 투자환경과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돈이 금고에서 잠잔다=올해 들어 최근까지 국민은행이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를 연 3.8%로 낮추는 등 시중은행들이 잇따라 예금금리를 낮추고 있다.

그런데도 3월 말 현재 은행예금은 지난해 같은 시기에 비해 8% 이상 늘었다. 또 3월 말 현재 ‘부동자금(만기 6개월 미만 단기수신)’은 387조6000억원으로 금융기관 총 수신의 49%로 사상 최대의 비중을 보이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 이재연(李載演) 은행팀장은 “최근 증권 및 부동산시장에서 이탈한 자금이 은행으로 계속 모여들고 있다”면서 “돈의 순환이 정상화되지 않는 한 은행예금의 비중은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들이 쥐고 있는 현금의 규모도 사상 최대 수준이다.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결산한 440개 상장사의 올해 3월 말 현재 평균 사내(社內) 유보율(자본금 대비 잉여금 비율)은 1년 전보다 39.3%포인트 상승한 495.5%. 이익이 남아도 투자하지 않고 단기 금융상품에 넣어두고 있는 것.

몰려드는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은행들이 안전자산인 국고채를 사려고 몰려들면서 3일 현재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4.18%로 지난해 말에 비해 0.64%포인트나 하락(채권가격 상승)했다.

▽돈을 안 빌린다=‘돈이 돈다’는 느낌이 확산되려면 가계와 기업의 대출이 늘어야 한다. 통화량은 투자나 소비를 위해 기업과 개인이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릴 때 증가하기 때문.

그러나 대기업의 대출은 5월 중 3000억원이 감소하며 4개월 연속 전월 대비 감소세를 보였다. 여유자금이 풍부하고 새로 투자할 사업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내수 위축과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의 대출도 위축돼 5월 중 중소기업 대출 증가액은 1조5583억원으로 작년 같은 달의 4조9214억원의 31.6% 수준에 그쳤다.

우리은행 정태웅(鄭泰雄) 부행장은 “우량 대기업은 돈을 빌릴 필요가 없고 돈이 필요한 중소기업은 신용도가 떨어져 선뜻 돈을 빌려주기 힘들어 기업대출 자체가 위축되고 있다”면서 “은행 입장에서는 자금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현재 262조5400억원인 가계대출도 정체상태다.

국민은행 윤종규(尹鍾圭) 부행장은 “한국주택금융공사의 모기지론 판매로 최근 그나마 주택 관련 대출 잔액이 늘고 있지만 증가율은 크게 떨어졌다”면서 “개인들은 지난 몇 년 사이 소비를 하거나 집을 사면서 이미 많은 빚을 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민은행의 경우 가계대출은 2002년 연간 23.5% 늘었으나 2003년에는 9.2% 늘어나는 데 그쳤고 올해 1∼5월 중 증가율은 3.2%로 뚝 떨어졌다.

▽돈이 돌게 하려면=전문가들은 지금처럼 돈이 돌지 않으면 내수 침체와 투자 축소가 계속돼 일본과 같은 장기 경기침체로 빠져들 가능성을 우려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丁文建) 전무는 “기업에 대해서는 규제 완화와 세금 감면 등을 통해 투자를 촉진하고 개인에게는 일자리 창출을 통해 소비할 능력을 갖춰줘야 한다”면서 “이와 함께 기업투자와 단절된 증권시장, 기업대출에서 멀어진 은행 등 금융시스템에 대한 근본적 개선방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난 몇 년간 한국 경제의 유일한 ‘돈줄’ 역할을 했던 부동산시장의 위축도 ‘동맥경화’에 걸린 돈의 흐름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금융연구원 최공필(崔公弼) 선임연구위원은 “돈이 돌게 하려면 막힌 길목을 빨리 뚫어 줘야 한다”면서 “부동산의 경우 보유세는 늘리더라도 거래에 대한 지나친 규제는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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