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20>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4년 4월 7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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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萬을 산 채 묻고 ②

지난날 천하 서른여섯 군(郡)이 시황제의 폭정에 시달릴 때, 초군(楚軍)을 비롯한 제후군(諸侯軍)의 장졸들은 여러 가지 일로 진나라에 불려 갔다. 그들은 먼저 부역으로 끌려가 아방궁을 짓고 여산능(驪山陵)과 만리장성을 쌓았으며, 운하를 파고 물길을 돌렸다. 또 일통천하(一統天下)로 사방에서 맞게 된 오랑캐 때문에 변방 여기저기로 보내져 몇 년씩 수(戍)자리를 살기도 했다.

그때 부역을 나오거나 수자리 사는 이들을 감시하고 부린 것이 진나라의 이졸(吏卒)들이었는데, 사람을 거칠고 모질게 다룬 적이 많았다. 엄한 진나라 법을 구실로 욕설과 매질은 말할 것도 없고, 심하게는 형벌로 병신을 만들거나 죽이기까지 했다. 따라서 단 한 번이라도 부역이나 수자리를 살러 간 적이 있으면 그들은 어김없이 진나라 이졸들에게 이를 갈았다.

그런데 진나라 이졸들이 장함(章邯)을 따라 항복하게 되면서 사정은 바뀌었다. 이제는 제후군의 장졸들이 항복한 진나라 이졸들을 거꾸로 감시하고 부리게 된 까닭이었다. 제후군 장졸들은 진나라 이졸들을 종처럼 부리면서 걸핏하면 학대하고 모욕했는데, 때로는 고의적인 앙갚음을 하기도 했다.

장함을 따라 항복한 지 두 달이 넘도록 예전에 밑에 두고 부리던 제후군의 장졸들에게 끌려 다니며 구박을 받고 혹사를 당하자 항복한 진졸(秦卒)들도 점점 참을 수 없게 되어 갔다. 그러나 승세에 취해있는 제후군 장졸들의 학대와 모욕은 갈수록 더해졌다. 그 뚜렷한 현상이 바로 신안(新安)성 밖에서 일어난 그 두 가지 일이었다.

그 두 일이 빌미가 되어 그날 밤 진졸들의 움막에서는 심상치 않은 논의가 있었다. 그날 제후군 장졸에게 매를 맞은 사람 중에 하나가 울분에 차서 말했다.

“우리는 장함 장군의 말씀을 믿고 제후군에게 항복하였으나 아무래도 속은 것 같다. 장(章) 장군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라고 하였으나, 싸움터에서 죽는 것만이 죽는 것이라더냐? 매 맞아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어도 죽기는 마찬가지다. 저 무지막지한 제후군의 장졸들에게 종살이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가 어찌 온전하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 제후군이 관중(關中)으로 들어가 바로 진나라를 쳐 없앨 수 있다면 우리도 풀려나고 가솔(家率)에게도 탈이 없게 될 것이나, 만일 그리 되지 못하면 일은 아주 고약하게 된다. 싸움에 진 제후군은 우리를 끌고 동쪽으로 물러날 것이고, 진나라는 우리가 도적 떼에 빌붙었다 하여 우리들의 부모와 처자를 모조리 죽이고 말 것이니 그 일은 어찌할 것이냐?”

다른 진졸 하나가 그렇게 받자 다시 또 다른 목소리가 비분에 떨며 결연히 말했다.

“이제라도 달리 계책을 세워야 한다. 장함 때문에 싸움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항복했으나 우리는 그래도 20만이나 된다. 마음을 모으고 힘을 합칠 수만 있다면 아직도 때는 늦지 않다!”

그렇게 시작된 논의는 이 움막 저 움막으로 옮아가 곧 불온한 웅성거림이 되었다.

글 이문열 그림 박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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