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성원/'아니면 말고'식 대정부질문

  • 입력 2003년 10월 19일 18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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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국회 마지막이자 노무현 정부 출범 후 첫 정기국회 대정부질문이 열린 18일 국회 본회의장.

질의에 나선 한나라당 안택수(安澤秀) 의원은 “북한측이 내년 6월 15일을 ‘남북합방일’로 정하고 이를 위해 최근 해외에 있는 친북좌익세력을 서울에 집합하도록 지령을 내렸다고 한다”며 정부측 입장을 추궁했다. 답변에 나선 조건식(趙建植) 통일부차관이 “확인되지 않은 첩보 내용”이라고 비켜갔지만 안 의원은 거듭 정부의 대책을 따져 물었다. 안 의원은 이날 아침 미리 배포한 질문원고에서 이 ‘첩보’의 출처를 “최근 국회 의원회관에서 정보지 형식을 빌려 유포되고 있는 내용”이라고 소개했다.

시중의 ‘유언비어’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한나라당 의원들의 질문은 이날 하루 종일 이어졌다. 이원창(李元昌) 의원은 이날 “노 대통령 당선 이후 당선 축하금 명목으로 권력실세들에게 전달된 돈의 총규모가 500억원에서 600억원”이라고 주장했지만 어떻게 500억∼600억원이란 엄청난 규모의 돈이 축하금으로 전달됐는지 개략적인 산출 근거조차 제시하지 않았다.

김무성(金武星) 의원은 한술 더 떴다. 그는 개혁당 유시민(柳時敏) 의원의 ‘주중 북한대사관 방문’ 의혹을 제기했다가 유 의원이 ‘중국 영토에 발 한번 디뎌본 적 없다’고 반박하는 신상발언을 하자 2시간 만에 부랴부랴 사과성명을 내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 의원들은 모 장관의 가족 문제까지 들먹이며 “전 남편이 송두율(宋斗律)씨와 잘 아는 사이라는데 사실이냐”는 질문 내용을 사전 배포한 원고에 넣었다가 실제 질문 때는 슬그머니 빼기도 했다.

물론 국회의원이 의혹이 있는 사안에 대해 국회라는 무대를 빌려 문제를 제기하고 정부의 답변을 추궁하는 것은 국민대표기관으로서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국회의원에게 면책특권이 주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검증조차 거치지 않은 내용을 ‘한건주의’식으로 터뜨리는 한나라당의 행태는 아무래도 내년 총선을 앞두고 ‘무리한 내용이더라도 언론에 한번 뜨면 남는 장사’라는 안이한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더욱 걱정되는 대목은 이런 한나라당 의원들의 황당무계한 질문 내용이 당 지도부의 ‘주문생산’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한나라당 의원들의 행태를 지켜보며 ‘두 차례나 대통령선거에 지고도 아직 국민의 의식수준을 얕잡아 보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한나라당이 다짐하는 ‘수권(受權)정당’의 면모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란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박성원 정치부기자 sw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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