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진석/'부적격 대변인' 國益 해쳐

  • 입력 2003년 3월 24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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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좋아하는 언론과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언론에 대해 호오(好惡)의 감정을 뚜렷이 드러내는 특징이 있다. 대통령이 어느 특정 매체를 좋아하고 또 어떤 신문에 대해 그와 반대의 감정을 가졌는지 언론에 관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게 된다. 권력과 언론의 유착을 끊겠다고 공언하면서도 특정 언론과는 우호적인 말과 행동을 취하는 행보도 서슴지 않는다.

‘오보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언론보도 내용을 망라해 청와대에 보고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언론 보도의 잘잘못을 구분하는 구체적 유형과 대응 방법까지 하달할 정도이니 언론 보도의 고의성에 상당한 의구심을 지닌 듯한 인상도 풍기고 있다. 기자실 등록제, 취재원 실명제, 사무실 방문취재 금지, 브리핑제 운영 등이 나오는 것도 대통령의 이 같은 언론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논란 끊이지 않는 '청와대의 입' ▼

송경희 청와대대변인이 계속 구설수에 오르고 경질론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청와대대변인은 일부 언론이 개혁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라는 인식 아래 정부와 언론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겠다고 벼르는 분위기에서 선정됐다. 이런 ‘청와대의 입’이 출범 초부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면, 그야말로 ‘국익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시 점검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송 대변인이 발탁된 배경은 지난 정부에서 청와대대변인의 권한이 너무 막강했다는 이유가 작용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청와대 내부의 권력 배분이, 민감한 국사(國事)를 알리는 막중한 자리에 부적격자를 배치해 국익에 어려움을 가져오는 상황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게 된다.

말의 무게는 권력에서 나온다. 힘없는 사람은 아무리 목청을 높여도 말발이 서지 않지만 힘있는 사람이 조용히 속삭이는 한마디에는 천근의 무게가 실린다. 그러기에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격언은 칼과 펜이 맞서는 현실에서 적용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다. 언론에 비해 압도적인 힘을 지닌 권력이 사라진 뒤에야 이루어지는 역사의 평가일 뿐이다.

우리는 바로 지난 정권이 언론에 가했던 다양하고 세련된 언론 억압 전술을 익히 보았다. 국세청의 세무조사와 공정거래위원회의 과징금 부과를 통한 언론사 목조르기, 검찰을 통한 사법처리, 특정 언론을 향한 편파적 비난과 무슨 안티운동, 필자들에 대한 인신공격 등 언론통제를 다룬 교과서에도 볼 수 없는 화려한 ‘전술’들이 담긴 ‘언론문건’과 이를 실행에 옮기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다.

대변인제도는 미국에서 건너온 언론계 ‘최대의 수입품’이라는 것이 어느 신문사 워싱턴특파원 시절에 조세형(趙世衡) 현 주일대사가 내린 정의(定義)였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인 1969년에 쓴 글에서 그는 미국의 대변인시스템에 대해 소개하며 부러운 듯이 그렇게 말했다. 당시 백악관에는 차관보급인 30세의 새파랗게 젊은 로널드 지글러 대변인이 하루 두 차례씩 기자회견을 하는데, 그가 던지는 말의 권위는 바로 대통령의 말과 동격으로 취급된다는 것이 특파원 조세형씨가 본 미국 백악관대변인의 위상이었다.

대변인이 반드시 거물급이라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제도가 모델이라면 청와대의 대변인은 정해진 답변만 전달하는 메신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말을 잘 다룰 줄 아는 전문인이나 달변이 아니라 하더라도 말에 무게와 신뢰가 실리는 인물이라야 할 것이다.

▼훈련통해 육성할 자리 아니다 ▼

대변인은 훈련을 거치면서 육성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는 현재 이라크전쟁과 북한 핵사태, 그리고 불안한 경제문제 등에 직면해 있어 한가하게 인물 테스트를 하고 있을 형편이 아니다. 청와대대변인의 말은 한번 내뱉으면 주워담을 수 없다. 대변인의 역할은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모쪼록 이번 ‘참여정부’가 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재설정하겠다고 내놓은 여러 언론대책과 대변인 문제가 권력과 언론 양쪽에 다같이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기를 바랄 뿐이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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