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내셔널 어젠다委 제안]<15>과학기술

  • 입력 2003년 1월 27일 18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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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초 중국 칭화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삼성 3자간의 공동협력 프로그램 협약식을 마치고 KAIST 홍창선 원장과 삼성종합기술원의 손욱 원장이 칭화대 연구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연구실을 둘러본 두 사람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연구실에서는 이젠 차이가 없군요. 저 기술이 산업화만 되면 5년도 못 가서 추월당하겠습니다.”

한국의 첨단기술을 대표하는 두 사람의 놀란 표정은 한국의 5년 후 경쟁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그동안 한국의 위상을 흔히 호두까기 속에 낀 호두에 비유해 왔다. 선진국의 기술에 밀리고 중국의 저임금에 추격당하고 있다는 얘기였지만 이 말도 이젠 옛말이 되고 있다. 한국이 기술에서 중국에 앞서 있다는 가정 자체가 맞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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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인 1998년 1월 과학기술자 신년하례회에서 “과학기술자가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고, 자식들이 과학기술자 부모를 자랑스러워하도록 만들겠다”고 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공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과학기술자는 존경은커녕 기피의 대상이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는 1월 7일 과학기술자 신년하례회에 참석하기로 했다가 갑자기 취소했다.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음은 물론이다. 다행히 노무현 정부의 국정과제에는 ‘과학기술 중심 국가’가 포함됐다. 그것도 우선순위 4위로. 실망했던 사람들도 ‘한번 만 더 속아보자’는 심정으로 다시 기대를 갖는 분위기다.

과학기술의 핵심은 우수 인력이고, 기술 입국은 우수 인력을 이공계로 끌어들이는 데서 출발한다. 이공계 과목을 공부하면 손해본다는 인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기술입국’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이공계 관련 직종이 사회적으로 좋은 직업이라는 이미지가 생겨야 한다. 이공계는 세상과 담을 쌓고 작업장에 파묻혀 고생만 한다는 이미지, 기름때가 묻은 작업복에 머리는 언제나 부스스한 이미지는 깔끔하고 산뜻한 것을 원하는 신세대에겐 맞지 않는다.

일본은 TV 드라마에서까지도 과학기술자가 주인공이 되도록 배려를 한다. 영화사나 TV방송사가 좋은 과학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우수 과학도서와 만화를 선정해 상을 주고 대량으로 구입해 모든 학교에 나눠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경제적 보상도 중요하다. 사무직으로 진출한 동창생보다 3분의 2 수준의 월급을 받아야 하는 이공계 출신 연구원을 말로 위로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이공계 기피 인식을 바꾸려면 대덕연구단지 연구원들의 봉급부터 파격적으로 올릴 필요가 있다. 기술자나 연구원 중에도 억대 연봉자가 있어야 한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기술입국은 연구원의 월급을 3배로 올리는 데서 시작했다.

고위 공무원 임용시 이공계 목표제를 도입해 문호를 넓혀야 한다. 현재 15%인 고위공무원의 이공계 출신 비율을 50% 수준으로 올려야 이공계에 인력이 몰리고, 이를 통해 합리적인 현대 국가 경영도 가능하다. “이공계 출신이 무슨 행정이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 영국의 대처 전 총리, 구소련의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 프랑스의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 중국의 장쩌민 국가주석과 후진타오 총서기가 모두 이공계 공부를 한 사람들이다.

수학능력시험에서 수학 과학의 시험문제를 사회과목에 비하여 쉽게 출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고등학교 때 계열을 선택하면서 인문계를 택하는 이유로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이 ‘수학이 어렵고 싫어서’이다.

정부의 기초 과학기술 투자 비중도 늘려야 한다. 기술을 상용화해 수익성을 내는 응용 기술은 해당 기업들의 몫이다. 정부는 장기적 안목으로 기초 과학기술을 지원해야 한다. 2001년 한국의 총 연구개발 투자액 중 기초연구의 비중은 12.6%로 미국(15.6%) 독일(21.2%) 프랑스(22.0%) 등 선진국보다 크게 낮았다. 절대 금액으로 따지면 격차는 더 벌어진다.

한국을 21세기 ‘동북아 중심국가’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한다. 통상 국가나 마케팅 국가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얘기도 많다.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하려면 과학기술의 기반이 갖춰져야 한다.

일본은 강점기에 조선인들은 이공계 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반면 일본의 이공계 인력에 대해선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도 군에 보내지 않고 보호했다.

중국의 무서운 추격은 20년 전 시작한 ‘기술입국’의 산물이다. 지금 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벌려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이 우리에겐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이광형 KAIST교수 ·바이오시스템학과

▼중국에게 배우자▼

중국은 저임금 숙련 노동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공장’이 됐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첨단 과학기술 인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두뇌’가 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 제16차 공산당 전국대표자대회에서 당 총서기에 선출된 후진타오(胡錦濤)는 전 국민이 편안하게 사는 소강사회(小康社會) 건설을 중국의 목표로 제시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과학과 교육에 의한 국가의 진흥을 제창했다. 농촌인구 9억을 가진 중국 정권은 대개 농업정책을 최우선시해 왔으나 제16차 당대회에서 과학 우선의 노선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하이테크 입국’의 기치 아래 정보기술(IT), 바이오, 나노테크 등 첨단 분야의 핵심기술을 장악하겠다는 것.

중국의 새 지도부에는 전문성을 가진 테크노크라트가 포진했다. 칭화(淸華)대 수리공정(水利工程) 학과를 졸업한 후진타오 총서기를 비롯해 새 정치국 상무위원 9명 모두가 이공계 출신이다.

중국에는 이미 2만여개의 연구기관에서 약 755만명의 연구 인력이 활약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첨단기술 분야의 해외 유학파 인력이 중국으로 속속 복귀하고 있다. 현재 미국 내 중국인 유학생수는 6만명으로 세계 1위. 중국 당국은 ‘해외 유학생 창업원’까지 설치해 가며 해외의 인재들을 데려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국의 과학기술 드라이브는 2000년에 발표된 ‘10차 5개년 계획’(10.5 계획)에 담겨 있다.

이 계획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건설하기 위해 냉전의 산물인 ‘863 계획’에 기초하고 있다는 역설을 안고 있기도 하다. 863(86년 3월) 계획은 냉전 시기이던 1983년, 미국이 스타워스 프로젝트를 발표하자 기술 선진국과의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내놓은 계획. 이 계획에 따라 18개의 연구센터가 설립됐고 이후 15년간 약 3만명의 연구자가 육성됐는데 이들이 중국의 IT 1세대가 된다.

2001년 3월 주룽지 총리는 10.5계획의 구체화를 위해 항공우주, 정보, 신소재, 바이오 등의 첨단산업에서 기초와 응용 연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 중 하나가 국가 정보화계획이다. 중국은 이를 위해 초정부 기구인 ‘국가정보화 영도소조’를 만들었는데 후 총서기는 이 조직의 부조장 출신이다.

노승준 ㈜CJK스트래티지 대표이사


▼기술 관리도 중요하다▼

기술을 개발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를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술을 베껴오는 국가가 아니라 창출하는 국가가 되려면 허술한 지적재산권 보호장치를 정비해야 한다.

지적재산권 보호의 대표적인 문제점은 특허 및 실용신안 등록을 위한 심사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특허 한 건의 심사 기간이 한국은 2001년 평균 21.3개월로 프랑스 8개월, 독일 10개월, 미국 13.6개월 등에 비해 훨씬 길다. 심사관 1명당 한 해 심사 건수가 303건으로 미국 70건, 유럽연합(EU) 59건, 일본 203건 등에 비해 많기 때문이다. 업체들은 특허기술 확보를 바탕으로 한 신속한 투자결정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특허청 관계자는 “인원을 대폭 늘려 2005년까지 심사 기간을 15개월로 줄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특허 등록을 한 후에 이의신청과 무효심판청구를 통해 무효화하는 경우도 있어 막대한 개발비를 날리는 데 대한 불만도 높다.

지적재산권 담당 부처가 흩어져 있는 것도 문제다. 반도체 집적회로는 산업자원부, 컴퓨터 프로그램은 정보통신부, 저작권은 문화관광부, 종자 산업은 농림부, 특허 의장 상표 등 산업재산은 특허청, 산업재산에 관한 병행수입은 관세청, 의약품명 심사는 보건복지부가 관장하고 있다. 영역별 전문성을 감안하더라도 일관된 지적재산권 보호정책을 펼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특허 침해 다툼이 생길 경우 변리사가 특허법원이 아닌 법정에서는 소송 대리를 할 수 없어 특허권 보호에 소홀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대한변리사회 김병진(金昞鎭·변리사) 홍보이사는 “복잡한 기술적인 내용에 관해 변리사가 직접 법정에서 다루지 못하고 변호사를 보조하는 것에 머물러 특허권 보호를 위한 활동에 제약이 있다”고 말했다.

또 특허를 국제적으로 지켜내려면 영어, 국제법, 선진국의 제도 등에 능통한 전문가가 양성돼야 한다. 기술분쟁은 국제적인 싸움이기 때문이다. 해외 주요 자격증과 기준을 연동시키거나 영어, 국제법 등을 자격시험의 주요 과목에 편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자룡기자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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