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원순/새 기부문화 원년을 열자

  • 입력 2002년 12월 31일 17시 14분


2002년 한 해는 유난히 기부와 자선의 해라고 할 만했다. 사상 최악의 수해가 몰아닥쳤지만 우리 국민은 사상 최대의 기부로 이 재앙을 극복했다. 사상 최대의 장학재단이 출현하는가 하면 수백억원의 돈을 쾌척하는 고액 기부자들까지 있었다. ‘1% 나눔 운동’을 벌이는 ‘아름다운재단’에도 소액 기부자들이 줄을 이었다. 기분 좋은 한 해였다.

그렇다고 만족할 정도는 아니다. 대기업의 대주주들이 만든 재단들은 여전히 재산상속의 또 다른 편법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1% 기부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는 아직도 4000여 명에 불과하고 기부는 12월에 집중되었다. 자선과 기부의 수요는 365일 존재하므로 당연히 기부도 365일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자선과 기부는 하나의 문화로, 습관으로, 생활로 정착되어야 한다.

▼사회여건-관습 바뀌어야▼

따지고 보면 우리 국민은 감성적 기부에 강하다. 불쌍한 이웃을 보면 참지 못하고 주머니를 털어 기부한다. 방송사가 벌이는 ARS 캠페인에서는 1000원의 전화가 빗발같이 쌓여 순식간에 1억원을 돌파하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ARS 캠페인에 소개되는 사례는 극히 제한된 일부에 불과하다. 거기에 소개되지 않지만 우리가 지원하고 도와야 할 이웃은 지극히 많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을 위해서도 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기부는 단순히 자선만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공익을 위해 일하고 있는 시민단체에도 기부는 일상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기부는 이성적 기부라 할 수 있다. 이제 마땅히 감성적 기부에서 이성적 기부로 바뀌어야 한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기부는 종교단체들이 독식하고 있는 형편이다. 지난해 아름다운재단이 갤럽에 의뢰해 조사한 기부지수에 따르면 절반가량의 기부가 교회와 사찰 등 종교기관에 대해 이뤄지고 있었다. 이런 기부는 대부분 교회를 짓고 사찰을 짓는 데 사용된다. 종교단체가 복지시설을 운영하거나 공익사업에 출연하는 경우도 많지만 모금하는 비율에 비하면 적다는 것이다.

세제(稅制) 역시 기부에 우호적이지 못하다. 공익성 지정기부단체로 지정받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환경, 여성, 인권, 평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공익적 시민단체들 가운데 이러한 지정을 받은 단체는 거의 없다. 회원들이 내는 회비도 세금 감면을 받지 못한다. 시민단체들에게 손쉽게 법인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세금 감면까지 해주는 ‘NPO법’을 만든 일본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익단체로 지정되더라도 세금 감면의 비율이 너무 낮다. 선진국 수준만큼 확대되어야 마땅하다. 과거 1950년대에 만들어진 ‘기부금품 모집 금지법’ 역시 대폭 개정되어야 한다. 기부를 촉진하고 격려해도 부족할 판인데 규제하고 금지하다니, 새로운 시대에 맞을 수가 없다.

서민 대통령이 될 것을 공약한 노무현 대통령당선자가 국가의 복지정책을 강화하고 개혁할 것을 기대한다. 아직도 우리의 사회복지 예산은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낮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었지만 여전히 사회안전망은 충분하지 못하다. 어느 나라에도 국가에 모든 복지와 자선이 맡겨져 있지 않다. 오히려 복지국가일수록 민간에 의한 자선과 복지가 활발하다.

▼남 위해 돈 쓰는 고귀함▼

이웃과 사회공동체를 위한 기부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따뜻해지고 통합되어 있다는 뜻이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돈을, 누구나 힘들여 벌게 되는 돈을 남을 위해 쓴다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돈을 벌기도 힘들지만 그 돈을 잘 쓰는 것은 더 힘든 법이다. 성숙한 사회에서는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을 잘 쓰는 법을 안다. 자신과 자식을 위해서는 한푼을 아끼는 사람들이 자선과 공익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내놓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 새해에 새로운 물음을 던져야 한다. 진정하게 잘사는 길이란 무엇인지를. 2003년은 기부와 모금에서도 새로운 원년이 되기를 희망한다.

박원순 변호사·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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