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할머니論

  • 입력 2002년 12월 23일 18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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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이 어려울 때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강점은 광활한 대지(大地)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애로움과 부드러움이다. 그러나 위기를 만났을 때 여성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강인한 얼굴’로 바뀌어 난관을 헤쳐나간다. 이 점은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의 패전 후 재기를 이끈 것은 ‘어머니의 힘’이었다. 식구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며 정작 자신은 끼니를 거르는 등 가난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했다는 에피소드들이 전해진다.

▷모든 일본인을 울렸다는 소설 ‘우동 한 그릇’은 섣달그믐 어느 우동집에 어머니와 어린 아들 둘이 찾아와 우동 한 그릇을 주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버지를 여읜 이들은 3인분의 우동을 주문할 형편이 못된다. 세 명이 음식점에 들어와 한 그릇을 시키는 것은 동양의 체면문화에서는 꽤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아들은 쑥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어머니의 속마음을 헤아린다. 세 명이 한 그릇을 시킬 수 있는 그런 용기를 갖고 열심히 살자는 메시지다. 10여년 후 장성한 아들은 어머니와 함께 다시 우동집을 찾고 지금까지의 인생 중 가장 사치스러운 3인분의 우동을 주문한다. 이들과 같은 일본의 어머니들은 이제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있다.

▷일본 도쿄도의 이시하라 신타로 지사가 할머니를 비하하는 발언을 해 일본 여성들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여성이 생식능력을 잃고 살아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거나 ‘할머니는 문명이 가져온 것 중 가장 유해한 것’이라는 게 그의 할머니론(論)이다. 한국인을 포함한 제3국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지칭하는 망언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이번 발언은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 의아스럽다. 그러나 일본의 천황제 자체가 여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이시하라 지사는 일본 정계에서 대표적인 우익인사이며 이번 발언은 천황제 또는 그 자신의 가부장적인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천황제에서는 남성만 천황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천황을 정점으로 한 남성 중심의 위계질서를 합리화시키고 있다. 일본인의 뿌리깊은 잠재의식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런 극언까지 거침없이 나올 정도라면 일본 사회의 극우적인 분위기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듯 하다. 이런 식으로 막 나가다가는 그 방향이 어디일지 어지럽다. 선진국 일본의 오늘을 있게 한 어머니 세대까지 부정한다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부정하는 부적절한 행동이 아닐까.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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