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광현/공약 실천 ‘무리수’는 안된다

  • 입력 2002년 12월 19일 18시 27분


며칠 전 나라살림을 짜는 부처인 기획예산처의 한 간부를 만났다. 그는 대뜸 “대통령당선자가 결정되면 예산처가 맨 먼저 업무보고를 해야 할 텐데…”라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당선자가 선거 과정에서 밝힌 수많은 공약을 지키려면 이미 짜놓은 예산의 몇 배가 들지도 모르는데 ‘나라 곳간’ 상태가 어떤지를 먼저 알아야 할 게 아니냐는 설명이었다.

선거는 끝났지만 공약은 남아 있다. 노무현 대통령당선자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꼭 실천하겠다는 장밋빛 공약이 300여쪽에 달하는 공약집을 빼곡히 메우고 있다.

복지나 교육처럼 ‘베푸는 정책’에는 ‘대폭 증액’ 같은 말꼬리가 붙어 있다. 대신 세금 관련 공약은 모두 ‘감면’이다. 기업에는 법인세를 깎아주고 개인에게는 소득공제를 늘려 세금부담을 줄여주겠다고 했다. 몇 천억원이 더 들어가든 현재 국내총생산(GDP) 대비 4.7%인 교육재정을 6%까지 대폭 올리겠다는 약속도 했다.

간단히 말하면 국민에게 줄 것은 많이 주고, 받을 것은 적게 받겠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국가채무는 줄여 나가겠다고 했다. 공약끼리도 앞뒤가 안 맞는 게 수두룩하다.

현재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5%대 초반이라는 데 정부나 경제전문가들은 대부분 동의한다. 그렇지만 노 당선자는 매년 평균 7% 성장은 문제없다고 주장했다. 현 상황에서 이를 달성하려면 물가불안에 ‘거품경제’가 따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선거 공약은 국민과의 약속이다. 지켜야 할 핵심 공약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권자의 표’가 최우선 과제인 선거에서는 어느 정도 선심성 공약이 묻어 있기 마련이다. 당선된 뒤 모든 공약을 억지로 지키려 하다가는 더 큰 부작용을 낳는다. 현실적으로 얼마나 시급한지, 재원 확보에 무리가 없는지, 경제논리를 너무 무시하거나 ‘도덕적 해이’를 낳을 가능성은 없는지를 꼼꼼히 따져 선별해야 한다.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은 “공약하되 잘 지켜지지 않으면 이유를 잘 대는 게 능력 있는 정치인”이라고 했다. 노 당선자가 모든 선거 공약에 얽매여 결과적으로 나라를 더 어려운 방향으로 몰고 가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김광현기자 경제부 kk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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