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후보 공약이 이렇게 가볍다면

  • 입력 2002년 12월 13일 18시 20분


정치지도자의 말에 믿음이 있을 때에만 책임정치도 가능하다. 한 번 공언한 것은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지키려 하고, 그렇지 못하면 깨끗이 책임지는 성실함이 그런 정치의 기본이다. 그러나 바람에 날리듯 가벼운 현 대통령후보들의 언행은 이런 기대를 접게 한다. 대국민 약속이 하룻밤 자고 나면 뒤바뀌는 판이니 공약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경우 올초만 해도 대선전 개헌 논의는 적절치 않다고 했다가 몇차례 곡절 끝에 임기를 단축해서라도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공약집에서 밝힌 대학의 자치 및 재정자율성 보장과 최근 회견에서 밝힌 등록금 동결 공약도 배치된다. 호주제나 기초생활보장제에 대한 입장도 일관성이 다소 떨어진다.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와 가까스로 공조를 성사시킨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정책은 아예 ‘노무현색깔’을 찾아보기조차 어렵게 됐다. 두 사람의 정책 합의에 대해 양당 관계자들조차 ‘정몽준프로그램’을 거의 그대로 수용했다고 평가할 정도니 완전히 ‘정몽준색깔’로 덧칠했다고 하는 게 보다 정확할 것같다. 주저주저하다 이원적집정부제나 별로 다를 바 없는 분권형대통령제에 합의했을 때부터 이미 노 후보의 변색은 예고됐다.

북한의 핵의혹에도 불구하고 현금지원사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어정쩡한 자세로 돌아선 것은 예전의 노 후보 모습이 아니다. 그동안 재벌개혁을 외치면서 유지 필요성을 강조했던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단계적으로 완화한 것에 이르면 ‘노 후보의 공약에 과연 노무현은 있는가’라는 의문까지 든다. 상속증여세 부과와 관련해 완전포괄주의에서 유형별포괄주의로 후퇴한 것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대선까지 며칠 사이에 또 얼마나 많은 공약들이 ‘변조’될지 모른다. 선거도 치르기 전에 이렇게 쉽게 바뀔 것이라면 집권 후 공약이 지켜질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공약에 속아 5년씩이나 나라를 맡기는 것은 참으로 허망하고 위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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