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 '아마조네스'들

  • 입력 2002년 12월 8일 15시 15분


필리핀과 미얀마는 12월인데도 기온이 섭씨 30도를 오르내린다. 폭염과 장대비, 말라리아와 콜레라, 이질적인 언어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 한국의 이미지를 빛내고 있는 '아마조네스'들이 있다. 외교부 산하 한국국제협력단(KOICA·총재 김석현) 소속 여성 봉사단원들이다.

한국국제협력단이 지난해 파견한 인력(134명) 가운데 여성 비율은 68%. 올해는 139명 중 72%가 여성이다. 한국 경제의 큰 힘으로 떠오른 여성들이 제3세계 사회개발에도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지난해 11월 파견된 3명의 젊은 여성 단원들을 현지에서 만나 양국에서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내 이름은 산산"

필리핀 수도 메트로 마닐라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거리에 종려나무로 빽빽한 파나이섬이 있다. 이곳 공항에서 차로 1시간 가량 달리면 나오는 일로일로주(州) 뉴 루세나에는 한국 여성 서승희씨(25)가 원주민들과 어울려 수익사업 및 지역개발 기획에 1년째 땀을 쏟고 있다. 그는 전북대 대학원에서 지역개발을 전공하다가 실제 일을 해보고 싶어 한국국제협력단이 마련한 시험에 응시, 봉사단원이 됐다.

그는 "지난해 11월 이곳에 도착했을 때 현지인으로부터 가장 처음 배운 것이 총기 분해와 사격 연습이었다"고 말했다. 총기 소유가 자유로운 필리핀 특유의 치안 불안 때문이다. 마닐라에서 6월에는 한국인 외교관이, 11월에는 한국인 외교관 운전수가 피살됐다.

"생전 처음 총을 쏴봤어요. 이곳 마약인 '샤부샤부'에 취해서 가끔 난동을 부리는 사내들 때문이지요. 지금도 제 방엔 권총과, 코코넛 벨 때 쓰는 긴 칼 3자루가 있어요. 다행히도 지금까지 써본 적은 없어요."

필리핀은 중산층이 없으며 빈부격차가 심하다. 7600만 인구의 30% 가량이 하루 1달러도 벌지 못하지만 15대 가벌(家閥)이 국부의 절반 이상을 쥐고 있다. 수도인 메트로 마닐라를 이루는 8개 도시 중 가장 번화한 마카티 시의 토지 전부를 아얄라 가문이 소유하고 있을 정도다.

서씨는 "전형적인 빈촌인 뉴 루세나 원주민들과 함께 올 봄부터 장식용 화초인 '펌'의 상업적 재배를 비롯해 라이스 케익과 피넛 버터를 만드는 등 수익사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여덟 가구에게 종자돈을 나눠주고 각각 돼지 1마리를 사들이게 해 양돈업을 도입시켰다. 3일에는 주민들과 함께 두 달 가량 힘 쏟아온 마을회관을 완공시켰다.

서씨와 함께 활동중인 현지 일롱고 개발센터의 필로테오 팔마레스국장은 "서씨가 워낙 근면하고 부드러워 현지인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기자가 서씨와 함께 찾아가자 수 십명의 주민이 나와 서씨를 반겼다.

서씨는 "이곳 사람들처럼 손으로 밥을 먹고 현지 일롱고 말을 배우는데 힘쏟았다"고 말했다. "마용아가(안녕)""살라맛!(고마와)""부소코(배불러)" 등이 자주 쓰는 말. 정감을 느낀 현지인들은 서씨를 지금 "산산"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산산은 원주민 가운데 흔한 이름인 수산에서 산 부분을 반복해 부르는 것.

● 농장에 가득한 그린 파파야 향기

서씨가 일하는 뉴 루세나에서 밀림 속의 도로를 따라 3시간 가량 달리면 아클란주(州) 칼리보가 나온다. 이곳 광활한 숲 속의 아클란 대학 농대의 작은 농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가 문미정씨(25)다.

문씨는 연암축산원예대학을 마치고 장애아동들을 돕다가 지난해 11월 해외 봉사단원으로 파견됐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국제협력단을 해외 인신매매단으로 오해해서 설득하는데 힘들었다"고 말했다.

문씨가 일하는 농장 주변에 치안 불안은 없지만 '자연'이 무서울 때가 있다. 밤에는 뻐꾸기 우는 것 같은 도마뱀 울음소리가 가까이서 들린다. 하루 20번 이상 물어뜯는 모기 때문에 고생하기도 했다. 결국 토착방식대로 해결했다. 부코쥬스(코코넛 물)를 자주 마시면 모기가 달려들지 않는다더니, 정말 그랬다. 봄에는 방에 뱀이 나타나 주둥이를 벌렸지만 퇴치에 성공했다.

그는 한국에서 약 100여종의 채소 과일 씨앗을 가져와 심었다.

"필리핀은 햇볕이 세고 폭우가 잦아요. 작물보다 잡초가 더 빨리 자라고 해충도 많죠. 더위에 지친 현지인들은 농약 치기나 김매기 같은 번다한 일을 싫어해요. 이런 현실에 맞는 작물을 골라주는 게 제 일이죠. 토마토 가지 호박 들깨는 재배 실패, 참외 오이 상추 고추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부추가 혼자서도 잘 자라 필리핀인들이 기르기에 딱 좋다"고 덧붙였다.

그는 타임 마조람 바실 오레가노 같은 허브(향초)들을 필리핀 현지인들에게 소개한 것이 보람이라고 말했다. 이들을 생전 처음 본 필리핀인들은 씨앗을 얻어가 상업 재배하기 시작했다. 문씨는 대신 농장에 가득한 파파야 향기를 맡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했다.

"'그린 파파야 향기'라는 영화를 보면서 어떤 향인지 궁금했어요. 해가 지고 나면 온 농장에 퍼져나는 파파야 향기는 그윽하고 달콤한 것이지요. 마치 순박한 필리핀 사람들처럼 말이에요."

●"봉사단원이 상류층이 돼다니"

인도차이나반도의 동쪽 미얀마(옛 버마)에 도착하면 특이한 지폐들을 볼 수 있다. 45짜트(화폐 단위)와 90짜트 짜리다. 군부 출신으로 5일 숨진 네원 전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숫자 '9'를 좋아해서 9의 배수에 해당하는 지폐의 제조를 지시했다. 지금도 계속되는 미얀마의 군부 통치 기간 동안 뒤틀려버린 경제의 단면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인당 GNP 300달러선인 이 나라에서 공무원인 의사들의 월급은 고작 10달러(약 1만 짜트) 수준이다. 의사들은 밤에 개인병원에 나가 돈을 번다.

미얀마의 수도 양곤 외곽의 밍갈라동 난초연구소에서는 국제협력단의 봉사단원 강성숙씨(32)가 일하고 있다. 그는 "협력단에서 매월 기초생활자금으로 봉사단원들에게 330달러를 보내주는데 여기선 고액 연봉자들이나 받는 돈"이라며 "가난한 나라에 봉사하러 온 사람이 본의 아니게 상류층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하는 한국인이 되려고 한다"고 말했다. 오전 8시면 사람들이 매달려 터질 것 같은 버스를 타고 출근해 꼬박 8시간 이상씩 난초 재배와 연구원들의 연구 기반 조성에 힘을 쏟는다. 한국국제협력단으로부터 3500달러를 지원 받아 미얀마인들에게 상업용 난초 재배를 가르칠 수 있는 교육관을 건설중이다. 인근의 묘판 집결지에는 스프링클러와 물탱크 시설도 갖춰주었다.

'여성 신문' 기자였던 그는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서는 남성들이 부처에 한 단계 다가선 것으로 취급받기 때문에, 여성들은 성소에는 접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성들은 '론지'라 불리는 치마를 입는데, 론지가 걸린 빨래줄에는 여성들의 빨래를 걸 수 없다고 한다.

강씨는 "사람들이 성은 쓰지 않고 이름만 사용하는 것도 미얀마만의 특색"이라고 말했다. 같은 성끼리 근친결혼을 하기 쉬운 구조라고 한다. 이름에는 태어난 요일을 넣는 관행이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재야 지도자 아웅산 수지의 경우 '수'는 화요일에 태어난 것을 뜻한다.

강씨는 "미얀마는 19∼21세기 문화가 공존하는 국가"라며 "가난하지만 한국을 모델로 경제 성장을 이뤄보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마닐라.양곤=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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