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원암/쉽게 내놓은 신용불량대책

  • 입력 2002년 12월 4일 18시 18분


배가 몹시 고픈 개들이 강 건너에 있는 먹잇감을 보았다. 허기진 개들은 강을 헤엄쳐 건널 생각을 못하고 강을 건너기 위해 강물을 몽땅 마셔버리기로 했다. 개들의 배는 불룩해졌지만 곧 터지고 말았다. 어렸을 때 읽은 이솝우화의 한 대목이다.

이제 대통령 선거도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일단 강을 건너야 한다. 먹이를 사냥할 수 있는지는 그 다음 문제다. 승리의 강을 건너기 위해 각 정당들이 수많은 공약을 내걸고 저마다 꼭 지키겠다고 다짐하지만 정작 선거가 끝난 후에는 공약(空約)이 되고 마는 현실을 수없이 보아왔다.

▼선거앞 오해부를 일 말아야▼

3일 민주당과 정부는 우리 경제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대규모 가계부채와 무더기 신용불량자 문제에 대해 개인 신용회복(워크아웃)의 신청자격을 대폭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종전에는 3개 이상의 금융기관에 5000만원 이하의 빚을 진 사람만 신용회복을 신청할 수 있었으나, 이 자격조건을 대폭 완화해 2개 이상의 금융기관에 3억원 이하의 빚을 지닌 사람도 신용회복을 신청할 수 있게 했다. 이렇게 신청자격을 완화하면 현재 신용불량자로 등록된 250만명 가운데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90만명이 신용회복을 신청할 수 있게 된다.

가계대출과 신용불량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지난 5년 동안 가계부채는 두 배로 늘어나 400조원을 넘었으며, 가구당 빚도 3000만원을 넘었다. 같은 기간 개인 신용불량자도 거의 두 배로 늘어 현재 250만명을 넘었다. 내년부터는 모든 개인의 현금대출정보가 집중되면서 금융기관들이 가계대출을 꺼리게 될 전망이다. 특히 국내외 경제가 불안정해지면 신용불량자가 300만명을 넘을 것으로 우려된다.

현재 한국의 가계부채 의존도는 미국 등 여타 선진국보다 높은 수준이므로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가계부채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은데 공연히 떠벌려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급증하는 가계부실과 신용불량자를 볼 때 뒷짐지고 있을 형편이 아닌 것 같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지 않기 위해 정부와 금융기관이 사태 해결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무엇보다 경제의 신뢰도를 높이고 경제안정을 이루는 정책이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대책이다. 소비와 부동산투자에 의한 성장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지속 가능하지도 않으므로 당장 소비가 위축되더라도 경제가 더 안정된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신용불량자들의 신용회복을 위해서는 개인 워크아웃제도를 확대해 참가하는 금융기관의 수를 늘리고 신용회복 조건을 완화해 실질적 지원을 해야 한다. 아울러 신용불량자의 도덕적 해이를 줄일 수 있도록 심사를 강화해야 한다. 각 금융기관은 신용회복 지원 프로그램과 고액 채무자를 위한 개인회생제도를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 정부와 민주당이 발표한 신용불량자 대책을 가계부채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한 종합대책이라고 간주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우선 이런 중차대한 대책을 선거를 앞두고 정부가 아닌 여당에서 발표했다는 점이 의혹을 사고 있다. ‘배밭에서는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고 했는데 득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부 정책을 선거를 며칠 안 남기고 당에서 발표하니 더 의심을 받게 된다.

▼금융기관과 합의도 없이…▼

발표 내용도 신청조건을 대폭 완화하겠다고만 했지 금융기관과의 합의 내용이 빠져 있고 재경부와의 협의 부분에서도 혼선을 빚고 있다. 또다시 공적자금을 투입해 신용회복을 지원한다면 그것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구제의 비용을 금융기관이 부담하는 것이라면 금융기관과의 합의가 필수적인 것은 자명한 이치 아니겠는가.

아무쪼록 이번에 발표된 가계부채 대책이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주도면밀하게 마련한 종합대책의 일환이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강을 건너려면 귀찮더라도 헤엄을 쳐야지 강물을 마실 수는 없는 일이다.

박원암 홍익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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