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승철/기업 돕지는 못할 망정…

  • 입력 2002년 8월 18일 18시 59분


“공무원 수를 3분의 1로 줄이고 대신 그들에게 대우를 잘 해줘야 한다. 그래야 민간에 대한 쓸데없는 간섭이 줄어들어 나라살림이 잘 돌아갈 것이다.”

고위 경제관료를 지내다 최근 민간쪽으로 나온 A씨의 말이다. 그는 공무원으로 일할 땐 모든 일에 정부가 관여해야만 공정한 게임이 이뤄지고 민간에 맡기면 질서가 엉망이 될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관복(官服)을 벗고 보니 자신의 과거 과오가 보이더라는 것. 민간활동을 돕기는커녕 사사건건 규제하는 것이 공무(公務)라고 착각하는 관료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는 것이다.

재정경제부에서 일하다 증권계로 온 B씨는 “주가가 폭락할 때 걱정스러운 것은 정부가 증시부양책을 내놓는다는 점이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긴급 수급대책 탓에 시장이 더욱 왜곡된다. 나 자신도 한때 이런 정책에 관여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허망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B씨는 “장차관이 주재하는 회의에 민간기업인들을 오라 가라 하는 것도 난센스다. 산업자원부 같은 데는 걸핏하면 기업인들을 모아놓고 대책회의를 갖거나 고위 관료가 기업현장을 방문하는데 이것 대부분이 ‘이벤트’ 성격이 짙다”고 꼬집었다.

관권 횡포와 정부시스템의 오작동(誤作動)에 대한 전직 관료들의 지적은 숱하다.

C씨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을 뽑는 과정에서 정부가 특정인을 당선시키려 사전 홍보활동을 했다. 웃분의 지시로 내가 총대를 멨다. 하지만 정부 의도가 먹혀들지 않았다. 결국 정부가 밀었던 후보는 단 1표만 얻는 데 그쳤다. 정부의 횡포가 응징을 받은 셈이다”고 반성했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D씨는 “공정위가 갈수록 설립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 안타깝다. 기업 비리를 캐는 사정기관처럼 바뀌는 것 같다. 특히 작년에 언론사에 대한 부당내부거래 조사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로 진행된 것으로 보여 훗날 그 과정이 규명되면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고 지적했다.

통상업무에 한동안 몰두했던 E씨는 “국익을 좌우하는 통상외교 현장에 전문공무원이 거의 없다. 전문성, 외국어 실력, 경륜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한 공무원이 한국 대표로 나가니 실패하기 십상이다. 인력을 키우는 마땅한 대책도 없다는 점이 더욱 심각하다”고 비판했다.

정부의 어카운터빌러티(accountability·공직자들이 그들의 행동을 시민에게 보고할 의무 또는 시민들이 그 행동이 불만스럽다고 여길 경우 공직자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민주주의의 본질 요소 가운데 하나다. 한국에서는 관권 횡포와 관료들의 무능 때문에 어카운터빌러티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있다.

정부 출범 초기엔 으레 공공부문의 개혁이 논의된다. 하지만 기존 관료조직과 공기업 조직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쳐 흐지부지된 게 역사적 경험이다.

이젠 더 이상 이 문제를 방치할 수 없다. 그랬다간 국가 발전에 엄청난 걸림돌이 될 것이고 공복(公僕)이 시민 위에 군림하는 해괴한 상황이 계속될 것이다. 이번 정권이 아무리 여러 치적을 외쳐도 공공개혁에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는 점에서 성공한 정권이라 보기 어렵다. 고승철 경제부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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