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공인회계사 “아! 옛날이여”

  • 입력 2002년 7월 31일 17시 29분



【한국공인회계사회가 발간하는 ‘월간 공인회계사’ 6, 7월호는 한국 공인회계사(CPA)와 업계에 대해 다소 상반된 내용의 글을 실었다. 동명회계법인 이구학 대표이사는 이렇게 썼다.

“우리 공인회계사들은 사회지도층인가? 명칭에 선비 사(사)자가 들어 있으니 우선 해당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2만여가지의 직업이 있고 그 중에서 소위 의사, 변호사, 공인회계사를 자본주의 사회의 3대 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특히우리 공인회계사들에게는 자본주의의 파수꾼이란 별칭이 따라다닌다.”

그러나 정민근 안건회계법인 전무는 7월호 명사칼럼에 “공인회계사 업계는 우울하다”고 썼다.

자본주의의 꽃이자 파수꾼이라는 그들은 왜 우울한 것일까.】

▽회계사 수난 시대〓정 전무는 “최근 예금보험공사가 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의 부실회계에 대한 책임을 물어 회계법인에 소송을 제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이는 업계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업계가 잔뜩 긴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도산한 대기업들의 회계부정이 드러나면서 부정을 막지 못했거나 부정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청운(1999년 4월)과 산동(2000년 9월) 등 잘 나가던 회계법인이 간판을 내렸다.

지난해 2월에는 회계사가 분식회계와 관련해 사상 처음으로 구속됐고 회계부정사건 때마다 수십명의 회계사가 징계를 받았다. 올 3월에는 국내 최대 회계법인인 삼일회계법인의 파트너 4명이 파면됐다. 회계사와 회계법인에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소송도 97년 이후 10여건이 제기된 상태다. 5월27일에는 돈을 받고 코스닥등록기업인 프로칩스의 분식회계를 눈감아준 회계사 3명에게 손해배상 판결이 내려졌다.

미국에서도 엔론 사태에 연루된 아더앤더슨이 해체 위기에 놓였고 그 여파로 아더앤더슨의 국내 제휴사인 안진회계법인이 제휴사를 찾아 하나회계법인과 9월 합병할 예정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마사지’〓회계사들은 ‘마사지’를 가장 두려워한다. 이들이 말하는 마사지란 △회계감사 도중 문제점이 발견되면 장부를 적당히 뜯어고치도록 하거나 △담당회계사가 ‘한정’ 또는 ‘부적정’ 의견을 내놓으면 팀장이 수정 완화하는 것을 가리키는 은어(隱語). 고객확보 경쟁이 심하다 보니 생기는 일로 감사에서 문제점이 지적돼도 “웬만하면 고객(기업)편에서 생각하라”는 압력이 들어오곤 한다는 것.

이런 위험을 피해 일찌감치 업계를 떠난 사람도 많다. A씨(34)는 “‘원래 다 그런 것’이란 말을 들으며 점점 무감각해졌다”며 “그러나 대우그룹 분식회계사건으로 회계사들이 실형을 받는 것을 보고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2000년 회계법인을 나와 벤처기업의 재무담당 이사로 취직했다. 회계법인에 소속된 B회계사(35)는 “내 의지로는 통제되지 않는 ‘과거의 잘못된 구조 및 관행’과 이에 대한 소송 증가 때문에 위태위태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고 푸념했다.

▽합격해도 찬밥〓7월 현재 회계사는 5915명. 지난해부터 합격자가 1000명으로 늘어나면서 성적과 출신학교, 나이 등에 따른 회계사의 차별화가 심해지고 있다. 500명을 뽑던 시절에는 모든 합격자가 외국 회계법인과 제휴한 이른바 빅5 회계법인에서 2년 동안 수습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해 수습등록을 한 734명 가운데 회계법인이나 감사반에 자리를 잡은 사람은 81.5%인 598명이다. 나머지는 정부기관이나 기업에 자리를 잡았는데 30명은 아직도 오라는 곳이 없다. 일부 합격자는 올 초 ‘수습 자리를 보장하라’며 금융감독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공인회계사들이 다른 일반기업에 취직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올 초 모 증권사 대졸공채에는 공인회계사 20여명이 지원해 9명이 서류통과를 했지만 최종합격은 1명도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강수 삼정회계법인 회계사는 “기업들은 ‘회계사는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채용에 소극적”이라고 말했다.

▽변해야 산다〓이강수 회계사는 신뢰의 붕괴 문제에 대해 “경영자들이 회계부정을 계획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회계사도 ‘전문가적 회의(professional skepticism)’를 가지고 더 열심히 기업을 감시해야 한다”며 “그러나 기업측에서 1년 내내 작업해 정교하게 숨겨놓은 것을 두 달 남짓한 감사로 밝혀내기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B회계사는 감사의 질을 높여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저가 수임료가 현실화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업계의 회계감사 덤핑관행이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건회계법인 정 전무는 “충분한 인력을 투입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감사보수, 12월에 몰려 있는 기업의 결산기,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는 감사수임제도 등 감사에 제약을 가하는 많은 요소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 회계법인이 공공기관 회계감사를 1900만원에 해 준 뒤 20억원짜리 컨설팅을 따낸 일은 유명한 사례. 공정성과 엄밀성이 요구되는 회계감사업무는 터무니없이 싼값에 서비스를 제공해 일단 고객을 확보한 다음 비싼 컨설팅 수입으로 이윤을 남기겠다는 영업구조가 남아있는 한 수임료의 현실화는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공인회계사 20명 이상인 국내 주요 회계법인 (단위:명)
법인회계사수법인회계사수
삼일741하나 38
안진272우리 36
안건 230인덕 35
삼정 228제원 28
영화 216서일경영27
신한 117삼화 25
삼덕 110부일 22
대주 105선진 22
신우 60송현 21
삼경 51인일 20
대성 42성신 20
화인경영40
자료:공인회계사회

회계법인의 손해배상능력 현황 (단위:백만원,%)
연도·구분2000. 32001. 3
손해배상공동기금11,34413,919
(5.36)(2.42)
손해배상준비금22,18830,222
(10.49)(5.25)
기타자기자본54,96062,721
(25.99)(10.89)
자기자본 계88,492106,862
(41.84)(18.55)
전문직업인배상책임보험123,000(58.16)469,256(81.45)
손해배상능력합계211,492(100.00)576,118(100.00)
자료:금융감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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