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태훈/표류하는 추모공원

  • 입력 2002년 5월 15일 18시 59분


화장장과 납골당 등 추모공원 건립을 둘러싸고 극한 대립을 벌이고 있는 서울시와 서초구 주민들이 14일 다시 한번 서로에 대한 ‘불신의 벽’만을 확인했다.

이날 오후 서울시청 3층 태평홀에서는 고건(高建) 시장과 주민들 간의 ‘특별 데이트’가 이뤄졌다. “절대로 우리 땅에는 추모공원을 지을 수 없다”는 주민들의 면담 요청을 고 시장이 받아들인 것.

취임 이후 매주 토요일 민원인들과 ‘시민과의 데이트’를 하고 있는 고 시장이지만 추모공원 건립과 관련해 시장이 주민들과 직접 대화에 나선 것은 처음인 데다 평일이어서 이날 면담에는 ‘특별’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러나 오후 3시반 시작된 데이트는 초반부터 꼬였다. 서울시가 토지전문가, 언론인, 변호사 등 각계 전문가 6명을 행사장에 초청한 것이 발단이 됐다.

주민대표 11명이 “시장과 직접 대화를 하러 온 것이지 토론을 할 생각은 없다”며 ‘형식’을 문제삼아 배석한 전문가와 시청 간부들의 퇴장을 요구한 것.

30여분간의 설전 끝에 고 시장은 전문가들을 내보낸 뒤 “시청 공무원들까지 나가라 마라 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맞받았고 주민들은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다. 공사 강행시 발생하는 모든 불상사는 시가 책임져야 한다”며 집단 퇴장했다.

이날 데이트가 초반부터 삐걱거린 배경에는 서울시의 무성의가 한몫을 했다는 평가도 없지 않다. 주민들은 당초 14일 오후에 시장과 면담하기를 원했으나 시측은 11일 오전 9시40분경에 면담시간을 11시반으로 촉박하게 통보했다. 이 바람에 주민들이 크게 반발했고 면담은 결국 14일로 미뤄졌다.

추모공원 건립사업은 면담의 형식을 문제삼아 대화공간을 깨버린 주민들과 말로는 ‘열린 시정(市政)’을 외치면서도 고답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서울시 사이에 끼여 표류를 거듭하고 있다.

이태훈 사회2부 jeff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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