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로넨 핀란드 대통령 인터뷰

  • 입력 2002년 4월 10일 15시 29분


첫 여성 대통령. 오랜 동거 끝에 여섯 살 연하의 남성과 재혼한 페미니스트….

타르야 할로넨 핀란드 대통령의 이력에는 보편적 범주를 넘어서는 ‘파격’ 이 묻어난다. 그는 지난 8일 한국을 국빈 방문했다.

세상의 프리즘에 의해 투영되는 이미지에서 벗어난 ‘인간 할로넨’ 을 엿보기 위해, 여성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 9일 오후 하얏트 호텔 소회의실에서 만났다. 인사를 건네며 내민 기자의 명함을 받아든 그는 깔깔 웃으며 영문을 몰라하는 기자에게 농담부터 꺼냈다.

성이 김씨군요. 처음에 한국 사람들을 만났을 땐 모든 사람들이 김, 이, 박씨인줄 알고 무척 혼란스러웠어요

수명의 수행원들에 둘러싸여 다소 경직됐던 분위기가 호탕한 그의 웃음으로 금세 부드러워졌다. 그는 이화여대를 방문, 강연을 마친 뒤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여성들에게서 받은 인상은 어땠고,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까.

매우 총명하고 당찬 학생들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있다면 한국의 미래는 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생들에게 라틴어인 ‘carpe diem(seize the day)’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하루 하루를 내 것으로 만들어 정복하란 뜻이죠.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될 때까지 또는 자신이 꿈꾸는 목표를 성취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즐겨라, 그리고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 행동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젊은 여성들의 패기와 당당함 등에 깊은 인상을 받으셨다고 하셨지만, 사실 기혼이건 미혼이건 한국 여성에게 출산과 육아는 사회진출의 커다란 걸림돌입니다. 여성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모든 혁명은 바로 가정에서, 가족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죠. 딸에게도 자신감을 심어주고 아들과 똑같이 교육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모들이 동등한 역할분담을 통해 자녀들이 남녀평등 의식을 자연스럽게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조부모의 역할 또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죠. 저는 바쁜 사회활동으로 제 딸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고 편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제 친정어머니 덕택입니다. 엄마가 자주 놀아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딸에게 어머니는 “네 엄마는 너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많은 어린이들을 위해,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하고 있다. 얼마나 훌륭한 엄마냐” 고 말해주시곤 했죠. 이처럼 가족 구성원들의 도움과 의식 변화가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입니다.

-여성권익이 그 어느 나라보다 신장돼 있다고 평가받는 핀란드의 여성정책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과거 소련과 치열한 전쟁을 치렀던 핀란드는 남성이 전선에 나가 있는 동안 후방에서 여성들이 남성들의 몫까지 맡아 해냈고, 이것이 남녀평등 의식을 고취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핀란드를 여성천국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정보통신분야에서 여성전문인력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여성기업인들의 수는 아직도 적고 진입장벽도 높습니다. 이런 문제 등을 시정하 위해 핀란드 산업통산부에서는 여성들만을 위한 융자대출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고 여성법을 따로 제정, 고용과정이나 직장에서 차별을 받을 경우 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출산 전후에 있는 여성들은 1년 가까운 출산휴가를 낼 수 있습니다. 만 3살이하의 아이를 둔 부모는 재고용이 보장된 무급 휴직을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남성들의 역할분담을 유도하기 위해 남성들에게만 한달 동안 출산 휴가를 내게 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호응도는 그리 높지 않죠. 유럽에서조차 아직 여성 대신 남성이 집에 있는다는 것이 거부감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남성 중심사회에서 훌륭한 리더로 인정받기 위한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을 꿈꾸는 한 여대생이 대신 물어봐 달라고 부탁한 질문입니다.

입은 하나이고 귀가 두 개인 남다른 이유가 있다고 하지만(웃음),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만큼 소수의 입장에 선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하지만 혼자만의 힘으로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없죠. 여성들간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평생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들을 남녀 불문하고 가급적 많이 차근차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대통령이 되는 것을 제 인생의 목표로 두지 않았습니다. 다만 정치인이 되고 싶었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었으니까요. 그 학생에게 대통령이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두기보다는 먼저 평생 신뢰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들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실행하라고 일러주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좌절했거나 자신의 한계를 느꼈던 경험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를 극복했는지 말씀해 주세요.

제 어머니는 정규교육을 많이 받으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권익에 큰 관심을 갖고 계셨고 다니던 직장의 노조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셨죠. 아버지 또한 이런 어머니를 이해해주셨습니다. 살아오면서 많은 고비들이 있었지만 그런 가족과 사랑하는 배우자 친구들이 많은 힘이 돼주었지요. 실패를 성공으로 이끄는 비결은 가족, 친구 동료들로부터 힘을 얻는 것, 그리고 때론 세상을 유머감각으로 갖고 바라보는 여유입니다. 유머야말로 평안을 주는 만병통치약이니까요.(웃음)

이혼후 현재 국회 전문위원인 연하의 남성과 재혼해 화제를 뿌리기도 했던 그녀의 이상적인 배우자상이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썸원 클로우스 투 유어 하트(Someone close to your heart·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죠)’ 라며 수줍게 웃었다.

약속시간을 초과했다는 비서관의 재촉에 못이겨 소회의실 문을 나서던 그가 기자쪽을 돌아보며 다시 말했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그 숙녀분에게 꼭 말해주세요. 할 수 있다고, 도전 해 보라구요.

그는 11일 핀란드로 돌아간다.

<김정안기자>cred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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