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과 사람]중국인 ‘마음속 큰산’ 泰山

  • 입력 2002년 3월 8일 17시 22분


절 상점 등으로 도심의 번화가를 방불케 하는 정상의 풍경이 어지러워 보인다
절 상점 등으로 도심의 번화가를 방불케 하는 정상의 풍경이 어지러워 보인다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인가.

산 정상까지 뻗쳐 있는 7412개의 가파른 계단. 끝없이 이어진 듯한 그 계단을 오르는 것은 등산이라기보다는 ‘고행’에 가깝다.

발걸음을 내딛는 게 위태로워 보이던 한 할머니가 시멘트 계단 바닥에 엎지러진다. 지쳐 주저앉는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는 기도를 드린다. 간절히 기구하는 표정으로 연신 뭔가를 중얼거린다. 초라한 행색이 시골 노인으로 짐작되는 할머니에게 이 산에 오르는 것은 등산이 아니라 바로 예배이며 순례에 다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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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泰山).

사람들은 흔히 ‘정상을 밟으려고’, ‘등정의 희열을 맛보기 위해’ 산을 오른다. 하지만 태산은 감히 ‘정복’을 목적으로 오르는 산이 아니다. 아기가 엄마 품을 찾듯 그 품에 그저 ‘안기기’ 위해 오르는 산이다. 태산이 전하는 말을 듣기 위해, 그리고 그 말에 복종하기 위해.

황해로 고개를 내민 모양의 중국 산뚱(山東)반도 동쪽을 지키고 있는 이 산의 높이는 1545m이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가 불러일으키는 연상과 달리 우리의 설악산이나 지리산보다 낮은 이 산이 그 높이보다 훨씬 커보이는 것은 평원 한가운데 난데없이 우뚝 서 있는 형상 때문이다.

하지만 태산이 ‘태산(泰山)’인 것은 그같은 자연물로서의 물리적인 높이 때문이 아니다. 중국인의 마음 속에서 세상 어느 산보다도 높고 큰 산이라서다.

태산의 산정상까지 이어져 있는 7400여개의 계단. 중국인들에게 태산을 오르는 일은 등산이 아니라 일종의 종교의식에 가깝다. 한 할머니가 계단을 오르다 바닥에 엎드려 뭔가를 기도하고 있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의 큰 산이라는 신비스런 요소가 중국인의 역사와 신앙과 만나면서 태산은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됐다. 동양적 신앙과 중국 역사의 결합이 1500여m터라는 물리적높이를 늘려 하늘까지 닿게 한 것이다.

태산곳곳에서 볼 수 있는 암각문과 건축물들, 비석들에는 이 산에 바치는 중국인의 찬사와 경배가 배어 있다.

태산은 그 태고적 자태로도 경배의 대상이었지만 고대 권력자들이 정치적 계산에 의해 신성화를 보탠 측면도 있었다.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려고 군웅이 할거하던 시절, 영웅들은 태산 정상에 올라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진시황 이후 72명의 제왕들이 태산에서 하늘에 고하고(封) 땅에 알리는(禪) 제사를 올렸다.

태산 남쪽 기슭 태산의 신을 모시는 대묘(岱廟)의 웅장한 위용은 태산제를 통해 정권 기반을 다지려 했던 권력욕의 흔적을 가늠해볼 수 있게 한다.

비석과 건축물 암각들은 태산이 권력자, 부귀한 자의 것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 비천한 민중들 또한 태산을 자기네 방식으로, 자신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사당 신전은 물론 나무와 계단 옆 철조망에까지 빽빽이 내걸린 부적과 복패들은 이곳이 또한 민중들의 비원의 성소(聖所)임을 보여준다.

‘등상태산(登上泰山)’이라는 복패를 걸어놓는 남자에게 무엇을 소원했느냐고 물었다.

“조상들에게 복을 내려줬던 것처럼 우리 가정에도 평안과 건강을 줄 것을 빌었다”고 그는 답한다.

부적들에는 김가평안(金家平安),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영결동심(永結同心-결혼을 앞둔 연인들의 부적) 등의 문구가 씌어있다.

그 옛날 왕조의 명멸이 거듭되는 파란의 틈바구니에서 생존과 안녕의 염원을 올렸을 선조들처럼 그 후예들이 이제 태산에 올라 이렇게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태산은 철저히 중국인의 산이다. 87년 유네스크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지만 이곳을 찾는 외국인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태산 기념관 안내원은 “1년에 태산을 찾는 방문객 3,400만명 중 외국인은 불과 10만명 정도”라고 말한다. 그것도 대부분 화교들이다.

하지만 태산은 한편으론 그 신성함으로 인해 오히려 인간들에게 짓밟혀 신음하는 ‘역설의 산’이기도 하다. 여관과 상점들로 뒤덮여 맨살을 찾아보기 힘든 정상은 ‘속세’의 번화한 거리를 방불케 한다. 태산이 중국인들의 마음 뿐만 아니라 자연 그자체의 산으로서 살아남으려면 치밀한 보호가 필요해보인다. 숭배라는 이름으로 수난받고 있는 태산 스스로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소연하고 있는지 모른다.

매서운 산정의 추위 속에 잠을 설치고 난 새벽녘. 호텔을 나서 정상 옥황정 주위로 오르니 사람들이 계속 모여든다. 바야흐로 또하나의 ‘의식’이 벌어지려는 순간이다. 일요일이라 금새 꽉 채운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더니 동쪽 황해 바다 쪽에서 붉은 해가 노을을 차고 올라온다. 정상 일대는 탄성과 소원 기도가 뒤섞여 소란해진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맞는 곳, 태산의 햇살과 함께 13억 대륙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지난 수만년간을 그래왔던 것처럼.

태산(중국)〓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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