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윤정훈/책 장례식이라니…

  • 입력 2001년 11월 5일 18시 40분


‘이문열돕기 운동본부’ 회원 40여명이 3일 오후 소설가 이문열씨 문학사숙인 경기 이천시의 ‘부악문원’ 앞에 모였다. 참석자들은 비판적 인물비평으로 유명한 ‘인물과 사상을 사랑하는 독자모임’ 소속 회원들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전국 150명 회원이 보냈다는 이씨의 소설 733권을 이씨에게 반환하겠다며 운구하듯이 옮겼다. 영문도 모르는 열 살짜리 초등학생이 이씨의 책표지로 만든 영정을 들고 모의장례 행렬 맨 앞에 섰다.

상복에다 조화까지 갖춘 참석자들은 1시간여 동안 진행된 ‘책 반환 행사’에서 조시(弔詩)와 조책문(弔冊文)을 낭독했다. ‘문학의 죽음’을 알리는 곡소리는 구호가 대신했다. “홍위병 발언 사과하라” “입장 바꿔 생각해봐 내가 너를 개라하면 기분 좋나”…. 참가자 중 한 사람은 2000만부가 넘게 팔린 이씨의 작품을 ‘독극물’로 규정했다. 이들은 장례식을 끝내면서 만세 삼창을 했다. “대한민국 만세” “한국어 만세” “우리 문학 만세.”

이날 참석자들이 문제삼은 것은 이씨가 신문 기고를 통해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홍위병’으로 몰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집단행동은 ‘몇 명이 모여 단체를 만든 뒤 익명의 다수를 위장하고 대표성을 주장’하는 것이나, ‘비전문적 정치 논리에 의지한 전문성 억압’ 같은 양상에서 이씨가 지적한 바를 연상케한다.

이날의 집단행동은 이들의 주장처럼 “세계 문화사에 유례가 없는 일”임에 분명하다. 열혈 공산당 학생들을 내세워 공산당 노선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억압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제외한다면 이런 사례를 찾기 힘들다.

강연 차 대구에 가느라 현장을 보지 못한 이씨는 참담한 심경을 피력했다. “내 자식(책)에 대한 사형식이 벌어진 것을 생각하면 못 견디겠다.”

집단행동으로 지식인의 표현의 자유를 위협한다면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일까.

윤정훈<문화부>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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