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구노트]한홍구교수/한국전쟁 민간인학살 끝없이 고민

  • 입력 2001년 9월 2일 18시 32분


한홍구교수
한홍구교수
얼마 전 크게 히트한 휴대폰 광고의 카피는 “묻지마, 다쳐!”였다. 물어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끊임없이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내 전공인 한국현대사이다. 요즈음의 내 관심사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미국 유학시절 내내 계속 관심을 가져 온 김일성과 193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에 사회적인 관심사로 부각된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문제다.

우리는 과연 북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연구는 북한 정권의 역사적 뿌리를 추적하는 작업이다. 주체사상으로 표현되는 북한의 극단적 민족주의와, ‘창업자’인 김일성에 이어 그 아들 김정일로 이어진 북한의 극단적인 개인숭배는 1930년대 만주의 산골에서 생활한 항일유격대들의 정서를 헤아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이런 관심에서 출발한 나의 연구는 박사논문인 ‘상처받은 민족주의: 민생단 사건과 김일성’으로 이어졌다. 최소 500명의 항일혁명가들이 일제의 간첩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라져 간 광기어린 민생단 숙청이 남긴 깊은 상처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건설한 북한 사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나는 박사논문을 수정하여 한국과 미국에서 출간하는 한편, 박사논문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1930년대 후반 이후의 김일성의 활동을 정리할 예정이다. 남쪽에서는 터무니없게 가짜로 그려지고, 북쪽에서는 엄청나게 부풀려져 그 실체가 왜곡된 김일성의 활동을 제대로 조명하는 작업은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긴요한 일이라고 확신한다.

또 하나의 관심사인 민간인 학살은 김일성 연구보다 더 어려운 문제다. 한국전쟁 시기의 민간인 학살은 머리로 이해하기 힘들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에도 너무나 무거운 문제이다. 그렇다고 사료가 풍부한 것도 아니니 쉽게 연구성과를 낼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그러나 현대사의 거의 모든 사건이 학살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니, 현대사 연구자로서 회피할래야 회피할 수 없는 주제가 민간인 학살이다.

서구의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흔히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 부르는데, 잊혀진 전쟁 중에서 가장 철저히 잊혀진 부분이 민간인 학살이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해의 진전은 우리가 여태까지 알아 온 한국전쟁의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구미 학계의 경우 홀로코스트나 제노사이드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만 우리 학계에서는 이제 시작이다.

민간인학살 자체만큼이나 끔찍스러운 일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100만명 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한 이 학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모르는 척 하거나 정말로 모른 채 반세기를 보냈다는 점이다.

이런 자발적인 기억상실은 우리 사회 전체와 개개인의 심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빨갱이는 죽여도 좋은, 아니 죽여야 한다는 것이 가치기준이 된 사회에서 자란 젊은이 30만명이 군인으로 보내졌던 베트남의 정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런 문제로 골머리를 썩느라 내 연구노트는 어지럽기 짝이 없다.

한홍구(성공회대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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