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문홍/첩보전쟁

  • 입력 2001년 4월 6일 18시 40분


“신사는 남의 편지를 뜯어보지 않는다.” 1929년 헨리 스팀슨 미 국무장관이 한 말이다. 당시 암호분야의 개척자였던 허버트 야들리가 외국의 암호문서를 해독해 장관에게 보고한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 1912년부터 미 국무부에서 암호 제작 및 해독을 전담한 ‘블랙 체임버’를 운영했던 야들리씨는 이로써 실직(失職)의 비운을 맞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스팀슨 장관 같은 정책결정자들이 정보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을 정도로 세상은 순진했는지 모른다.

▷그 후 미국의 정보력은 감히 다른 나라들이 넘볼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미국은 냉전이 끝난 90년대 이후에도 매년 국방예산의 10분의 1 수준인 약 280억달러를 정보분야에 쏟아 붓고 있다. 잘 알려진 미 중앙정보국(CIA) 외에도 첩보위성을 띄우고 운영하는 NRO, 모든 종류의 통신정보를 감청하는 NSA 등이 그 전위대들이다. 이런 기관들은 물론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다. 1960년에 설립된 NRO는 1992년에 와서야 미 정부가 그 존재를 시인했을 정도고, NSA의 별명은 ‘No Such Agency’(그런 기관은 없다) 혹은 ‘Never Say Anything’(아무런 말도 하면 안 된다)이다.

▷미국의 정보력은 지금 이 순간 지구 위를 떠다니는 전화, 팩스, 전자통신 등 모든 신호에 대해 “한 부씩 복사 부탁해요(One copy please)”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그 와중에 나온 부산물도 부지기수. 미 정보당국이 처음 만든 릴 테이프가 개량을 거듭해 카세트테이프가 됐고, 말하는 인형에 내장된 칩 속에도 이들이 심혈을 기울인 수학공식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정보당국이 없었다면 컴퓨터산업이 지금보다 10∼15년은 뒤져 있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미국첩보기 EP3기를 둘러싼 미중(美中) 갈등이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만약 중국 전투기와 공중 충돌한 미군기가 첩보기가 아니었다면 두 나라가 그 난리를 피웠을까. EP3에는 미국이 오늘날 유일 초강대국으로 올라선 정보력의 결정체가 들어 있다. 중국 당국자들은 지금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 모른다.

<송문홍논설위원>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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