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찬의 문화비평]혁명가 마르코스의 '이미지 변신'

  • 입력 2001년 4월 3일 18시 45분


검은 스키 마스크의 틈새로 드러나는 지적인 백인의 눈매, 정글의 혁명가답지 않게 부드러운 손,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에 전해지는 세련되고 정제된 언어.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지도자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인터넷 시대의 체 게바라로 일컬어진다. 20세기 최고의 혁명가라는 체 게바라와 비교되는 데 대해 오히려 그 자신은 체 게바라와는 다른 ‘평화협상가’임을 주장하며 정치지도자로의 변신을 선언했지만, 그는 이미 체 게바라의 재현으로 숭배되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맞서는 사람들의 상징적 존재가 돼 버렸다.

하나의 이미지가 이 정도 단계에 접어들면 이미지는 이미 현실을 넘어 상대적 독립성을 갖고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미지는 단순히 어떤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의식의 재현이 아니라 그 자체의 의미를 담고 있는 생명체가 된다.

마르코스 부사령관의 이미지가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형성 파급된 데서도 볼 수 있듯이 이미지를 생산 유포하는 기술의 급속한 발달은 로고스 중심주의 시대의 종언을 전해준다. 로고스 중심주의가 서구 사회에 존재해 온 인식방법의 하나일 뿐임을 지적하며, 이미지야말로 사유나 개념의 모태라고 주장하는 프랑스 사상가 질베르 뒤랑의 이미지 중심주의는 이런 시대적 변화와 함께 더욱 힘을 발휘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인 장 보드리야르가 지적하듯이 이제 이미지는 전염병처럼 증식하며 현실을 덮어 버릴 정도에 이르렀지만, 이미지가 진실을 가리거나 진실 아닌 것을 진실인 양 믿게 만드는 부정적 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Made in Earth, LG IBM’, ‘또 하나의 가족, 삼성’ 등 ‘브랜드’라는 이 시대의 대표적 이미지는 개별적 거래 행위나 특정한 상품 또는 개인을 뛰어넘는, 공급자와 수요자간의 상호 인정 관계를 형성한다. 이미지는 장황한 논리적 설명을 넘어서는 신뢰를 형성하며 그 이미지가 담을 가능성의 가치를 미리 확보한다.

어떤 이미지가 이 정도의 ‘브랜드’를 형성했다면 이 단계에서 하나의 선택이 요구된다. 그것은 현실과 독립적으로 가속화하는 이미지의 신화화를 묵과할 것인가, 아니면 이 이미지의 과도한 신화화와 맞서며 확고한 신뢰를 유지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미지의 속성을 잘 아는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영웅들이 흔히 빠지곤 하는 자기 이미지의 신화화를 경계하며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면서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허구성과 끊임없이 맞선다.

멕시코 인구의 10%에 불과한 원주민의 편에 서서 전세계의 ‘소수자’들을 대변하는 이미지를 확보한 것은 자기 이미지의 신비화에 맞서며 전세계로부터 자신의 ‘보편성’을 인정받은 결과다. 멕시코에서 진정 정의와 평화를 원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보여 준 보름간의 3000여 ㎞ 평화행진은 그 ‘신뢰’와 ‘보편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 것이었다.

이미지의 형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미지라는 우상 뒤에 안주하지 않는 ‘자기 절제’다.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過猶不及)”고 했던가. 이 말은 틀렸다. 지나치면 몰락의 나락이 그 앞에 있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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