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공항, 60년대 상류층 名所… 80년대 입양아 창구

입력 2001-03-20 18:38수정 2009-09-21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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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초부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제 관문’ 역할을 해온 김포국제공항이 29일 국내선 전용으로 탈바꿈한다. 국내 항공산업과 ‘영욕(榮辱)’을 같이했던 김포공항은 해외 창구 역할을 인천공항에게 넘겨주게 됐다.

60년대의 경우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탓에 가족이나 친지를 보내고 맞기 위해 공항을 찾는 것 자체가 ‘약식 해외나들이’로 여겨질 정도였다. 공항 청사 옥상에 설치된 ‘송영대(送迎臺)’에서 이륙하는 항공기를 향해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이 하나의 자랑거리였다고 김포공항 관계자들은 회고하고 있다.

70년대 들어서는 일본 적군파의 일본항공 요도호 피랍사건이 최고 화제거리였다. 당시 납치범이 ‘평양행’을 요구하자 납치범을 속이기 위해 항공기를 김포공항에 착륙시킨 뒤 여객기 주변의 공항청사에 ‘인공기’를 게양해 평양공항으로 위장하는 고도의 위장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70년대 중반에는 아시아권의 각종 축구대회가 김포공항의 분위기를 좌우했다. 성적이 좋을 경우 선수단의 세관 검색이 간소화돼 선수들이 외제 물품을 듬뿍 들여올 수 있었다. 반면 성적이 나쁘면 그 반대 현상이 빚어졌다. 건설경기의 ‘중동특수’도 이곳을 관문으로 해 이뤄졌다.

70년대말과 80년대 초에는 수출 진흥정책 때문에 공항 귀빈실이 바빴다. 정부 차원에서 수출 실적 1000만달러가 넘는 기업이 추천하는 해외 바이어들의 귀빈실 사용을 허용했기 때문. 현재 김포공항 귀빈실을 사용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이 국회의원이나 장관급 이상 인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조치였던 셈.

8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해외 입양아들을 에스코트하는 사람들이 여객 청사에서 자주 눈에 띄었다. 이들은 입양아들을 데리고 가는 대신 항공료를 할인받는 사람들로 주로 유학생들이 많았다. 일부 유학생들은 어린 입양아들을 에스코트한 경험이 마음에 걸려서인지 나중에 국내 고아들을 직접 입양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86년 아시아경기대회 직전 국제선 청사에서 벌어진 폭발사고로 30여명이 사상한 사건은 미제로 남아 있다.

최영철(崔映哲) 한국공항공단 홍보실장은 “지난 40년간 김포공항은 권력의 부침(浮沈)이나 사회 변화에 따라 크고 작은 해프닝이 발생한 한국사회의 축소판이었다”며 “29일 개항하는 인천공항은 김포공항이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를 교훈삼아 동북아지역 중추공항으로 우뚝 서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송진흡기자>jinh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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