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집 어때요]종로 계동 한옥 "생활의 여유 절로 우러나"

  • 입력 2000년 12월 14일 18시 27분


대문을 들어서면 겨울 햇볕에 비친 대청마루가 아늑하다.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은 혼자서 놀고 사랑채 안채 행랑채는 단아한 모습으로 서로 어울리고 있다. 소나무 한 그루만이 지키고 있는 마당에 서면 머리 속으로 한 줄기 청풍(淸風)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다.

서울 종로구 계동, 곳곳에 한옥 800여 채가 있는 북촌마을 한편에 건축가 김영섭씨(50)의 한옥이 있다.

“한옥은 지혜와 정서가 있는 곳입니다. 구조적으로도 매우 과학적이어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집이지요.”

강남의 아파트에 살던 89년, 김씨는 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큰 딸 나경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사각형 아파트에 유리창만 잔뜩 있고 ‘우리집’을 표시하기 위해 동 호수를 써 놓은 그림. “학군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성을 키우는 어린 시절의 주변환경”이라고 생각한 그는 미련 없이 강남을 떠나 이 곳으로 왔다.

그가 한옥으로 이사한 또 다른 이유는 ‘과연 한옥은 현대인이 살 수 없는 낡은 유물(遺物)인가’라는 건축가다운 물음에서 출발했다. 한옥에 직접 살아보면서 몸으로 부닥쳤고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김씨는 “내부만 일부 고치면 현대인이 살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사하기 전 집 일부를 현대식으로 개조했다. 집 내부에 화장실을 들이고 대청마루격인 거실에 나무로 된 삼중창을 만들어 끼웠다.

주방을 현대식으로 만들고 바닥에 보일러를 시공했다. 이 정도로 한옥의 단점은 충분히 극복한 셈. 그의 한옥은 능소헌(凌宵軒)과 청송재(淸松齋) 두 채로 돼 있다. 96년 맞닿은 한옥에 다가구주택이 들어서려고 하자 이를 사들여 청송재로 만든 것. 청송재는 손님방과 다실(茶室), 거실, 창고 등으로 이용한다.

한옥에서의 생활은 모든 것이 한 박자 느리다. 서양식 여닫이문과는 달리 한옥의 미닫이문은 빨리 힘주어 열려고 할수록 잘 열리지 않는다. 구조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의 흔적도 행동하기 전 한 번 더 생각하도록 만든다.

김씨는 “한옥은 건강 주택”이라고 강조했다. 지붕과 바닥, 벽의 황토가 인체에도 몹시 좋다는 것. 미국에 살고 있는 삼촌이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렇게 숙면을 취하기는 처음”이라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김씨는 한옥에 살 수 있는 ‘비결’을 귀띔해주었다. “한옥을 제대로 신축하려면 평당 건축비가 1000만원이 넘을 겁니다. 그런데도 한옥은 땅 값 정도에 매물로 나오지요.”

김씨 가족은 ‘한옥’과 너무 정이 들어 이사 같은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김영섭씨는 “건축물은 그 지역 특성에 맞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서울의 집과 부산의 집이 같아서는 곤란하고 미국의 집과 한국의 집이 같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가장 좋은 집은 한옥이며 집은 사람의 정서를 결정한다고 그는 확신한다. 또 “한옥은 누추하고 허름한 집이라는 통념을 하루 속히 깨뜨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옥은 안채 사랑채 등 채와 채가 저 만큼 떨어져 서로를 보고 있다. 그 사이에 고요한 마당이 있다.

그는 마당이 비워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당이 ‘비움의 미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각 방은 서로 나누어져 독립돼 있지만 마당을 통해 화합을 이룬다. 조화와 균형, 독립과 화합이 이뤄지는 곳이 한옥이라는 얘기다.

김씨에게 한옥은 ‘살아 있고 미래에 물려줄’ 건축문화의 교과서다. 한옥 속에 담긴 지혜를 아직 다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살면서 문득 문득 ‘한옥에 이렇게 과학적인 계산이 깔려 있구나’하고 감탄한다.

그는 옛날 모습과 꼭 같은 한옥을 지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옥의 지혜를 적용해 새로운 집을 지으면 된다는 얘기다. 김씨는 “아파트의 중간층을 비우거나 세로로 몇 층을 털어 바람과 시선이 통하는 한옥의 장점을 아파트에 적용해 볼 수 도 있다”고 말했다.

<이은우기자>lib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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