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봉건의 벽에 저항했던 나혜석의 외침은 아직도…"

  • 입력 2000년 11월 20일 19시 11분


“여자도 인간이외다!”

“나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인 줄 알았다. 노력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누가 내 발목을 잡는가?”

피맺힌 외침으로 봉건의 벽에 저항한 ‘불꽃의 여자 나혜석’을 그린 연극이 서울 마포구 서교동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나혜석(1896∼1948)은 최초의 여성유학생, 최초의 여성서양화가, 최초의 여성소설가, 여성최초의 해외여행 등으로 화려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 그러나 불륜과 이혼, 정조유린에 관한 위자료 청구소송 등으로 유명세를 치른 끝에 행려병자로 쓸쓸히 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성이기도 하다.

“현모양처는 있는데 왜 현부양부는 없느냐. 나혜석이 열아홉살 때 한 말이에요. 현모양처가 그렇게 좋으면 남자들도 현부양부하지 저희들은 왜 안하느냐는 거지요. 나혜석이 떠난지 52년이 되지만 세상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기획자인 산울림대표 오증자교수(서울여대)가 14일 오늘의 시점에서 나혜석을 다시 보는 토론회를 마련하면서 이렇게 운을 뗐다. 토론회에 초청된 이들은 건축가 김진애씨, 변호사 배금자씨, 방송인 이숙영씨와 ‘나혜석 평전’을 쓴 미술평론가 이구열씨.

자타가 공인하는 ‘애정당 당수’인 이숙영씨는 뜻밖에 “사랑도 허망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한때 사랑했던 남자들에게서 버림받는 나혜석을 보며 “남자도 믿을 수 없고 결국 돈이 최고라는 것을 절감했다”는 얘기.

배금자씨는 “이혼한 아내의 자녀를 면담할 수 있는 권리가 80년대에야 비로소 인정받았고 재산분할청구가 가능해진 것은 90년대 들어서였다“며 자녀면담과 재산분할을 요구했던 나혜석은 근 100년을 앞서간 여성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정작 관객의 열렬한 박수를 받은 것은 “나혜석은 참으로 바보같은 여성이었다”고 일침을 놓은 김진애씨의 말이었다.

“잘난 여자가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여자가 자기방어능력 없이 사회의 금기를 건드리면 파괴되는 거예요. 지금은 안그렇습니까? 당시가 남성위주의 유교사회라고 하는데 지금도 역시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인 것은 마찬가지예요.”

이같은 여성들의 논쟁에 이구열씨는 “20세기 여성사에서 차지하는 나혜석의 위상 중 불륜의 문제는 극히 일부분”이라며 “이 때문에 그가 남긴 예술이 간과돼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관객으로 이 자리에 참여했던 정희경씨(전 국회의원)는 “나혜석은 자기 ‘끼’대로만 살았던 인물이라고 본다”며 “어머니될 자격이 없는데 어머니가 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연극을 본 주부들은 반세기전의 인물이지만 오늘의 여성, 오늘의 가족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 작품이라는데 공감을 표시했다.

유진월 작, 채윤일 연출의 이 연극은 매주 수요일 오후3시 주부를 위한 특별공연을 마련하고 있다. 화목 오후7시, 수금토 오후3시, 7시, 일 오후3시. 2만원. 02―334―5915

<김순덕기자>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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