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참으로 무던한 국민

  • 입력 2000년 11월 10일 18시 48분


세상을 살아가면서 망각은 필요하다. 정신은 때때로 깨끗이 씻어 새로워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 작가 앙드레 모루아는 “망각 없이는 행복도 없다”고 단언한다. 오늘날 국민의 망각 때문에 가장 행복해할 집단은 정부 내 공정거래위원회일지 모른다.

2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공정위는 ‘IMF 긴급상황’을 명분으로 국민의 은행계좌를 법원영장 없이 마음대로 뒤질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 때나 지금이나 금융기관 거래명세는 영업비밀 또는 사생활 보호를 위해 금융실명제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과세와 금융감독 또는 법원 결정이 있을 경우에만 계좌추적이 가능토록 되어 있어 공정위에 별도로 권한을 주면 안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고 그래서 당시 국회도 논란 끝에 결국 여당 단독으로 관련법을 통과시켜야만 했다.

그 때 공정위는 “긴급 경제상황에서 기업의 구조조정을 위해 필요한 만큼 경제가 정상화되는 2년 뒤에는 시한연장을 요청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라고 국민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지난달 여당과 공정위는 법원영장 없이 은행계좌를 뒤질 수 있는 권한을 슬며시 3년간 연장키로 합의했다. 요즘은 웬일인지 2년만 더 하겠다고 꼬리를 내렸지만 ‘2년 전 약속’을 국민이 망각했으리라고 확신하는 모습은 역력하다.

명분은 기업들이 역외펀드를 이용한 내부거래의 가능성이 있고 벤처기업을 가장한 계열사와 불공정거래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가 위원장이 바뀌니까 갑자기 기업들이 더 교활해진 것인지, 아니면 시한이 다가오니까 ‘큰 칼’ 내놓기가 못내 아쉬워서 그러는 것인지 속을 헤아리기 쉽지 않다.

은행계좌 추적권은 이미 검찰이나 국세청이 갖고 있다. 필요하면 그들에게 요청해서 협조를 받으면 될 텐데 공정위는 “부처간에 협조가 잘 안되기 때문에 권한을 직접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처간 이기주의 때문에 협조가 안된다면 그 말은 이 정부의 기능이 정상적이고 건강하게 가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부 스스로 서둘러 고쳐야 할 심각한 병이다.

정부 부처마다 경쟁적으로 기업조사권을 쓰다 보니까 어느 회사는 작년 한해 무려 120일을 조사받거나 조사를 준비하는 데 써야 했다고 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공정위나 국세청이나 모두 정부인데 왜 재탕 삼탕 같은 조사를 하면서 들볶느냐고 불만이 많다. 그러고도 이 나라에서 기업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 참으로 무던한 국민이다.

기업들의 내부거래 수법이 지능화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적발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회피하는 기법이 고도화되면 정부의 단속기법도 거기에 맞춰 진화해야지, 머리 쓸 생각은 않고 손 안의 권력 쓸 생각만 한다면 그런 수준의 정부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정부는 지난 상반기 동안 10만건이나 금융기관 거래명세를 뒤진 것으로 집계됐다. 이 정부가 들어서기 전인 1997년 같은 기간에는 8000여건밖에 안됐다니 그 사이 기업이나 개인들의 성품이 갑자기 그만큼 나빠졌다는 의미인가. “그 때는 법원영장 없이 멋대로 뒤졌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정부 아래서의 10만건 가운데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아 뒤진 것은 9000건에 그친다. 역대 정권 가운데 가장 인권을 강조하고 시장주의를 부르짖는 국민의 정부 사람들한테는 통계가 야속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밀턴 프리드먼과 하이에크는 각각 ‘정부의 적극적 불간섭정책’과 ‘최소간섭의 원칙’을 통해 정부의 기업에 대한 간섭 철폐를 주창했다. 자유시장 경제에서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개인생활과 기업활동에서 불안과 불편을 제거해 주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른바 DJ 노믹스로 불리는 김대중 대통령의 경제철학도 바로 그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으로 요약된다. 공정위의 끝없는 욕심이 DJ 노믹스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시중의 비판은 그래서 나온다.

기업편을 들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재벌을 개혁하려는 정부의 의지를 비판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단지 경제가 급속히 어려워지고 있는 판에 나타난 계좌추적권 타령이 철없어 보여 하는 말이다. 약속 지키는 정부를 보고 싶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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